몽유도원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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偕樂)'을 통해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 전기 국보전' 이후 13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전시되었다. 단, 본 전시와는 별도로 [[10월 7일]]까지만 일반에 공개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92322081574524|제목=안견 '몽유도원도' 13년 만에 고국으로|출판사=아시아경제|날짜=2009-09-24|확인일자=2009-09-24}}</ref>
 
== 갤러리사진 ==
[[파일:Dream Journey to the Peach Blossom Land.jpg|thumb|center|800px|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한국의 [[일본의 중요문화재|중요문화재]], [[덴리 대학 부속 덴리 도서관]] 소장
]]
 
=== 제서(題書)와제서와 찬문 ===
{{인용문|"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은자(隱者)의 옷 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여러 천년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 그림이 다된 후 사흘째 정월 밤, 치지정(致知亭)에서 다시 펼쳐보고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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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의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치지정에서 시(詩) 한수를 지어 붙이는데, 치지정(致知亭)은 그 이름으로 보아 무계정사지안에, 엄청나게 많은책을 진열하고 독서를 하는 별서일것으로 짐작이 된다. 안견의 그림을 감상하고 지은 시와 친필글씨와 함께, 시서화(詩書畵)가 어우러져 삼절정(三絶頂)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 발문(跋文)요약= ==
안평대군의 발문을 요약하면, 내가 정묘년4월20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인수<ref>仁叟,朴彭年,박팽년</ref>와 함께 산 아래 이르러 높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깊고 험준하고, 복숭아가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 길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데 산관야복 차림의 행객을 만나니 정중하게 길을 가르쳐 주어 그 길로 인수와 함께 말을 몰아,깍아 지른 절벽과 수풀을 헤쳐 그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곳에 마을이 나타났고 사방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가려진 사이로 복숭아 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비치었다. 또 대나무 사이로 초막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섬돌은 무너져 가축도 없으며 앞 냇가에 빈 조각배가 물결 따라 흔들거려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인기척에 뒤를 보니 정보<ref>(貞父,崔恒,최항)</ref>.범용<ref>(泛翁,申叔舟,신숙주)</ref>도 동행 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 하였는데,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바쁜데 어째서 그때 꾼 꿈이 도원에 이르렀는가?” 뒷날 이 그림을 구해서 나의 꿈을 상상한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말이 있으리라. 꿈을 말한 후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완성되었고, 비해당(匪懈堂)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라고 되어있다.비해당은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하사받은 당호(집)이며, 매죽헌은 인왕산 아래 누상동 수성계곡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정자이다.
안평대군의 발문(跋文)을 요약하면,
내가 정묘년4월20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인수<ref>仁叟,朴彭年,박팽년</ref>와 함께 산 아래 이르러 높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깊고 험준하고, 복숭아가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 길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는데 산관야복 차림의 행객을 만나니 정중하게 길을 가르쳐 주어 그 길로 인수와 함께 말을 몰아,깍아 지른 절벽과 수풀을 헤쳐 그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곳에 마을이 나타났고 사방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가려진 사이로 복숭아 나무숲에 붉은 노을이 비치었다. 또 대나무 사이로 초막이 있는데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섬돌은 무너져 가축도 없으며 앞 냇가에 빈 조각배가 물결 따라 흔들거려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인기척에 뒤를 보니 정보<ref>(貞父,崔恒,최항)</ref>.범용<ref>(泛翁,申叔舟,신숙주)</ref>도 동행 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 하였는데,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바쁜데 어째서 그때 꾼 꿈이 도원에 이르렀는가?” 뒷날 이 그림을 구해서 나의 꿈을 상상한다면 반드시 무어라고 할말이 있으리라. 꿈을 말한 후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완성되었고, 비해당(匪懈堂)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라고 되어있다.비해당은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하사받은 당호(집)이며, 매죽헌은 인왕산 아래 누상동 수성계곡에 있었던 안평대군의 정자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 무계정사(武溪精舍)= ==
꿈속 도원과 비슷한 자리라고 생각한 곳을 찾아내어, 지리와 복서(卜筮)에 뛰어났던 이현로(李賢老)로 하여금 터를 보게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용이 일어날 땅(旁龍所興)’ 이라 하여 별당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 이때가 세종 29년(1447) 8월 30일인데 태조 5년(1396)에 세운 도성의 정문 숭례문(崇禮門)이 비좁아 왕은 좌참찬 정분(鄭笨)에게 명 하여 숭례문을 대대적으로 중축하게 되는데, 분(笨)은 신작이라 기록된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하였고, 용(瑢)<ref>안평대군</ref>은 친분이 두터웠던 분(笨)에게 장인(工匠)과 재목및 기와를 요청하니, 분은 선공 부정 이명민을 시켜 숭례문을 완공한 후 남은 자재로 도성 밖 부암동에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세워 1만여권의 책을 갖추고, 또 마포 용산강(龍山江)위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여러 선비들과 시화를 즐겼다. 특히 안평대군과 또래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등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절친한 사이이기에 같이 어울려 시회(詩會)를 즐겼으며, 특히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후(1450)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서 21명의 문사들과 치지정(致知亭)에서 몽유도원도를 감상 하면서,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시(詩) 한수를 지어 붙이는데, 자리를 같이한 문사들의 찬문을 이어받았다.
 
무계정사를 지은지 3년이 지난 단종 1년(1453) 9월 5일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시켜 선공 부정(繕工副正) 이명민(李命敏)에게 목수를 청하나 이를 거부하게 되니 한명회가 희롱하기를 "네가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위하여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세웠고, 또 담담정(淡淡亭)을 용산강(龍山江) 위에 지었으며, 또 김정승(김종서)을 위하여 별실(別室)을 짓는 데에 재목과 기와를 운반해 주고, 집을 얽고 담을 바르는 일을 일찍이 어렵지 않게 하였는데, 같은 왕자인데 홀로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는 어찌하여 한 장인(匠人)을 아까와하는가?" 하니, 이명민이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안평 대군은 일국에서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양 대군 같은 이는 비록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내게 어찌하겠는가?" 한명회가 당시 공조판서보다 실권이 센 이명민에게 떠보는 내용이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한달 전 일이다.
"네가 어찌 알겠느냐? 안평 대군은 일국에서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양 대군 같은 이는 비록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내게 어찌하겠는가?"
한명회가 당시 공조판서보다 실권이 센 이명민에게 떠보는 내용이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한달 전 일이다.
 
=== 몽유도원도와 대자암= ==
 
*계유정난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킨 친형 수양대군의 권력에 의해, 안평대군 용(瑢)은 정쟁의 패배자가 되어 실권을 박탈당하고, 10월 10일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해 10월 18일 유배지 교동도(喬桐島)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宜春君)은 진도(珍島)로 유배된 후 사사되었고, 의춘군의 아내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이조판서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지금은 개인 사유지로 변한 무계정사지 자리에 무계동(武溪洞)글씨의 각자(刻字)바위가 남아 있는데 안평대군의 서체가 확실해 보인다. 계유정난은 세조가 정치적 야욕을 가지고 단종을 보좌한 황보인. 김종서 등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세력을 살해할 때, 실록에는 그 명분을 이용(李瑢)이 붕당을 조성하여 모반(謀反)의 음모를 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조시대 모반은 십악(十惡)의 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인인데 그 집에다 후대인이 각자(刻字)를 새길리 만무하고 이 터는 당시 이현로가 방룡소흥(旁龍所興)의 땅이라 하였으며, 왕실과 관련된 태실(胎室)·궁지(宮址)·능묘(陵墓)·행궁터(行宮址)등 왕기(王氣)가 서려있는 땅이나, 왕실과 관련된 집은 일반 백성들 시이에서 몹시 꺼려하여 아무도 소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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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암
 
대자암은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 이종이 13세에 요절하여 아버지 태종에 의해 무덤옆에 1418년 4월 4일 지은 재암(齋菴)인데, 이 암자를 대자암(大慈菴)이라 이름하고, 노비 20구(口)와 전지 50결(結)을 붙이고,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게 하였다.
그 후 세종의 명으로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을 양자로 정하였고, 문종즉위년(1450)에 좌참찬 정분(鄭苯). 병조판서 민신등이 32년 전에 지은 것을 고쳐지어 "소헌 왕후(昭憲王后)의 기신재(忌晨齋)를 의례대로 대자암(大慈菴)에서 행하라." 하였으며, 종실에 반부(攀附)하여 무릇 큰 불사(佛事)는 모두 여기에서 행하니, 시사(施捨)하는 곡식과 비단을 이루 기록할 수 없었다. 대자암은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현재 고양시 덕양구 성령길 22-38, 대자동)에 대자사(大慈祠)라는사당이 성녕대군 묘지 바로 아래에 있으며 절터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 반출 경위 ==
=== 몽유도원도 반출경위 ===
현재 몽유도원도는 상하 두개의 두루마리로 표구되어, 일본의 덴리대학 부속도서관(天理大学 附属図書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1592년 5월 1일 임진왜란 때, 서울 남별궁<ref>현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ref>에 주둔한 총대장 평수가(平秀家)<ref>平秀家,타이라히라오Taira Hirao,たいら ひらお=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 Ukita hideie ,うきた ひでいえ는 동일인이다</ref>가 이 절에 보관하던 안평대군의 유품 중 [몽유도원도]를몽유도원도를 포함한 장서(藏書)와 금불(金佛)까지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일본에 반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 인 1593년 4월 13일 왜적이 선릉(宣陵, 성종)과 정릉(靖陵, 중종)의 재궁(梓宮)<ref>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관으로, 왕의 관을 재궁(梓宮)이라고 한다.</ref>까지 파헤쳐 진기한 수장품을 찾는데 혈안 이였고, 특히 궁중에서 [[수륙재]](水陸齋)<ref>바다와 육지에 있는 잡귀들을 위하여 재(齋)를 올리는 불교의 의식</ref>를 올리기위해 왕족들이 찾은 절을 집중적으로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