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Metrobot (토론 | 기여)
잔글 위키데이터와 로컬이 같은 위키공용분류 링크 조정
6 개의 출처 구조, 0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2)
55번째 줄:
[[파일:Roman Empire Map.png|thumb|left|300px|기원후 117년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제국 최대 판도.]]
 
193년에서 235년 사이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흔히 말하는 군인황제시대)로 [[헬리오가발루스]]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ref>헤이우드, 1971년. pp.589-592.</ref>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기(49년간 20여명의 황제가 교체됨)로 접어들었다.<ref>[http://history.boisestate.edu/westciv/empire/15.shtml 3세기의 위기 (235-285)] {{웨이백|url=http://history.boisestate.edu/westciv/empire/15.shtml |date=20070503114611 }} "서구 문명사"(''History of Western Civilization''), E.L. 스킵 녹스, [[Boise State University]]. 확인일자 2007-3-20.</ref><ref>헤이우드, 1971년. pp.592-596.</ref> 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와 부제(副帝)가 지배하는 [[사두 체제]]를 도입했다.<ref>[http://www.roman-emperors.org/dioclet.htm 디오클레티아누스 ( 284-305 AD)], 랄프 W. 메시센 (Ralph W. Mathisen). De Imperatoribus Romanis. 기록일자 1997-3-17. 확인일자 2007-3-20.</ref> 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현 이스탄불)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ref>[http://www.roman-emperors.org/conniei.htm 콘스탄티누스 1세 (306 - 337 AD)], 한스 A. 폴샌더(Hans A. Pohlsander). De Imperatoribus Romanis. 기록일자 2004-1-8. 확인일자 2007-3-20.</ref>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인 395년에 [[비잔티움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ref>[http://www.roman-emperors.org/honorius.htm 호노리우스 (395-423 AD)], 랄프 W. 메시센. De Imperatoribus Romanis. 기록일자 1999-6-2. 확인일자 2007-3-21.</ref>
 
4세기가 넘도록 서부 지역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퇴 일로로 치달았다.<ref>다이커, 2001년. p.155.</ref> 4세기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고트족이 밀려나 제국 국경 안쪽에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ref>[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nvas.html 서유럽에 대한 게르만족의 침입] {{웨이백|url=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nvas.html |date=20070523103249 }} 켈거리 대학(The University of Calgary). 기록일자 1996년 8월. 확인일자 2007-3-22.</ref> 401년 [[알라릭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 시를 약탈했다.<ref>Lapham, Lewis (1997). ''The End of the World.'' New York: Thomas Dunne Books. {{ISBN|0-312-25264-1}}. pages 47-50.</ref> [[반달족]]은 로마 속주인 갈리아, 히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ref>다이커, 2001년. p.157.</ref> 476년 9월 4일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ref>[http://www.roman-emperors.org/auggiero.htm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475-476 AD)--두 가지 견해], 랄프 W. 메시센(Ralph W. Mathisen)과 케오프레이 S. 너샌(Geoffrey S. Nathan). De Imperatoribus Romanis. 기록일자 1997-8-26. 확인일자 2007-3-22.</ref> 1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ref>더랜트, 1944년. p.670.</ref>
 
비잔티움 제국도 마찬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서쪽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잠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수복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몇 년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미쳤던 비잔티움의 세력 범위는 줄어들었다.<ref>다이커, 2001년. p.347.</ref>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치명적인 전염병 등으로 비잔티움은 또한 [[이슬람]]의 발흥에 위협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영토를 곧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ref name="Hooker'sByzantinepage">[http://www.wsu.edu/~dee/MA/BYZ.HTM 비잔티움 제국T], 리차드 후커. 워싱턴 주립대학. 기록일자 1999-6-6. 확인일자 2007-4-8.</ref><ref>Bray, R.S.: ''[http://books.google.com/books?id=djPWGnvBm08C&pg=PA26&dq=plague+of+justinian+decline&sig=ACfU3U3Y9OfbqWzKvC17ZwtT5opXY8RjeQ#PPP5,M1 역병의 군대들]'', 제임스 클라크 컴퍼니, 2004, page 26</ref>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8세기경 이슬람의 확대를 막아냈으며, 9세기 초에는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ref name=autogenerated2 /><ref>다이커, 2001년. p.349.</ref> 기원후 1000년에 비잔티움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바실리우스 2세|바실레이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 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영했다.<ref>[http://www.roman-emperors.org/basilii.htm 바실리우스 2세 (CE 976-1025)] 캐서린 홈즈. De Imperatoribus Romanis. 기록일자 2003-4-1. 확인일자 2007-3-22.</ref> 그러나 이 정복 이후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 이 사건은 결국 제국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백년간 내분과 [[터키]]의 침략으로 [[알렉시우스 1세|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Hooker'sByzantinepage"/> 서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인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여 비잔티움 제국에 파견한다. 수십년이 흘러 파견된 [[제4차 십자군]] 당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제국내의 물품을 약탈하고 비잔티움 제국은 잠시동안 분열되어 몇몇 후계 국가들([[니케아 제국]], [[라틴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에피로스 공국]])이 들어서다가 결국 [[니케아 제국]]이 최종 승자가 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ref>Gibbon, Edward.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11/PDFs/0214-11_Pt02_Chap61.pdf 61장] {{웨이백|url=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11/PDFs/0214-11_Pt02_Chap61.pdf |date=20080307071332 }}. 확인일자 2007-4-11.</ref> 제국 군대가 수도를 수복한 뒤 제국은 [[에게 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아무도 제국을 부흥시키지 못하고 결국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의 [[메메드 2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ref>[http://www.theottomans.org/english/family/mehmet2.asp 메메드 2세], 코르쿠트 오젠 (Korkut Ozgen). Theottomans.org. 확인일자 2007-4-3.</ref>
 
== 사회 ==
88번째 줄:
=== 교육 ===
{{참고|고대 로마의 교육}}
공화정 초기 로마에는 공립 학교가 없었다. 따라서 소년들은 [[부모]]나 노예 교사(paedagogi, [[고대 그리스|그리스]]에서 기원한 것이다)에게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ref name="Lecture 13">[http://www.historyguide.org/ancient/lecture13b.html 강의 13: 로마제국의 사회사 요약], 스티븐 크레이스. 기록일자 2006-10-11. 확인일자 2007-4-2.</ref><ref name="Adk211">애드킨스, 1998년. p.211.</ref><ref name="Werner31">Werner, 1978. page 31.</ref> 이 시대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은 젊은이에게 농업, 전쟁, 로마의 전통, 공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ref name=autogenerated2 /> 어린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ㆍ정치 활동을 하면서 사회 생활을 다양하게 익혔다.<ref name=autogenerated2 /> 귀족 자제는 16세 나이에 유력 정치인 밑에서 정치를 배웠으며, 17세부터 군대에서도 활동했다(이런 관습은 [[로마 제정|제정]] 시대에도 일부 귀족 가문 사이에서 계속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2 />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문화가 유입되어 교육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리스의 교육 방식과는 여전히 달랐다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2 /><ref>다이커, 2001년. p.143.</ref> 부모가 여력이 있으면 7살 나이의 소년과 일부 소녀들을 집 밖의 사립 학교(ludus)로 보냈다. 이들이 11살이 될 때까지 교사(litterator 또는 magister ludi)가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법, 때론 그리스어까지 가르쳤다.<ref name=autogenerated2 /><ref name="Werner31"/><ref name="TexEd">[http://www.txclassics.org/exceteducation.htm 로마의 교육] {{웨이백|url=http://www.txclassics.org/exceteducation.htm |date=20071225125840 }}. 라틴어 ExCET 준비. 텍사스 고전 연합, 지니 린제이(Ginny Lindzey) 씀, 1998년 9월. 확인일자 2007-3-27.</ref> 12살부터 학생은 중등 학교에 가서 교사(grammaticus)에게서 [[고대 그리스어|그리스어]]와 [[라틴 문학|로마 문학]]을 배웠다.<ref name=autogenerated2 /><ref name=autogenerated2 /> 16세 나이가 되면 몇몇 학생은 [[수사학]] 학교에 갔다(이곳 교사(rhetor)는 대개 그리스인 출신이었다).<ref name=autogenerated2 /><ref name=autogenerated2 /> 이 정도의 교육 수준은 법조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준비했으며, 이들은 로마의 법을 암기해야 했다.<ref name=autogenerated2 /> 학생들은 종교 축제나 장날 외에는 매일 학교에 갔으며, 여름 방학도 있었다.
 
=== 정치 ===
122번째 줄:
{{본문|라틴어|라틴어의 역사}}
 
로마인의 모국어는 [[라틴어]]로, 이 언어는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며 문법상 낱말 배열이 상당히 자유롭고, [[어간]]에 붙는 [[접사]]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ref>[http://www.utexas.edu/cola/centers/lrc/eieol/latol-0-X.html 라틴어 온라인: 시리즈 입문] 윈프레드 P. 레만과 조나단 슬로쿰(Winfred P. Lehmann and Jonathan Slocum). 언어 연구소.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 기록일자 2007-2-15. 확인일자 2007-4-1.</ref> 라틴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반을 둔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나왔다.<ref>[http://www.du.edu/~etuttle/classics/latalph.htm 라틴 알파벳] {{웨이백|url=http://www.du.edu/~etuttle/classics/latalph.htm |date=20070403040205 }}, J. B. 캘버트. 덴버 대학. 기록일자 1999-8-8. 확인일자 2007-4-1.</ref> 현존하는 [[라틴 문학]]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부터 쓰인 매우 정제된 문어인 [[고전 라틴어]]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구어]]는 [[민중 라틴어]]로 고전 라틴어와는 [[문법]]과 [[어휘]]가 다르며 심지어는 발음까지 상당한 차이가 있다.<ref>[http://classics.lss.wisc.edu/courses/Classical_Latin_Supplement.pdf 고전 라틴어 추가]. page 2. 확인일자 2007-4-2.</ref>
 
라틴어는 로마 제국의 주요 언어였지만, 로마인이 공부한 대부분의 문학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교양있는 상류층은 [[고대 그리스어|그리스어]]도 구사했다. 또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후대 [[비잔티움 제국]] 시대까지 그리스어가 라틴어 대신 제1언어였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은 뒤 그리스어는 비잔티움 제국 정부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ref>애드킨스, 1998년. p.203.</ref> 로마 제국이 확장되면서 라틴어도 전 유럽으로 퍼졌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민중 라틴어가 여러 지역에서 방언으로 갈라져, 수많은 [[로망스어]]로 발전하였다.
159번째 줄:
=== 오락 활동 ===
 
로마의 젊은이는 뛰기, [[레슬링]], [[권투]], 경주 등 여러가지 놀이와 체육을 즐겼다.<ref name=Cassononsports>카슨, 1998년. pp.98-108.</ref> 시골에서 부유층은 [[낚시]]와 [[사냥]]도 즐겼다.<ref name=SPQRonline>[http://library.thinkquest.org/26602/entertainment.htm#leisure 일상 생활:오락] {{웨이백|url=http://library.thinkquest.org/26602/entertainment.htm |date=20070430025620 }}. SPQR 온라인. 기록 1998. 확인일자 2007-4-22.</ref> 로마에는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다.<ref name=Cassononsports/> [[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 [[도박]]도 매우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ref name=Cassononsports/> 여성들은 이런 활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부자들은 저녁 잔치에서 음악, 춤,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다.<ref name=Adkinsonparties>애드킨스, 1998년. p.350.</ref> 평민들은 클럽이나 모임에서 비슷한 잔치를 열기도 했는데, 보통 오락을 즐기는 저녁 식사란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ref name=Adkinsonparties/>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을 가지고 혹은 목마 넘기를 하며 놀았다.<ref name=SPQRonline/><ref name=Adkinsonparties/>
[[파일:Retiarius stabs secutor (color).jpg|right|thumb|창투사 레티아리우스가 결투 상대인 검투사 세쿠토르에게 삼지창을 겨누고 있다.]]
검투는 인기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검투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는데, 황제의 손짓으로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지었다. 영화에 나오는 모습과 달리, 여러 전문가들은 검투사를 죽이라는 손 동작은 ‘엄지손가락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그 손짓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전문가는 승자 쪽으로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려서 패자의 죽음을 명령했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지 않고 주먹을 들어올리면 살려주라는 뜻이었다고 보고 있다.<ref>[http://penelope.uchicago.edu/~grout/encyclopaedia_romana/gladiators/polliceverso.html 검투사와 엄지 손가락]. 로마나 백과사전. 시카고 대학. 확인일자 2007-4-24.</ref>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죄수나 검투사를 무장하거나 맨몸으로 경기장에 놓고 동물을 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