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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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달의 5세손인 '''[[윤관]]'''(尹瓘)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냈다.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에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면으로 출전하여 함주(咸州), 영주(英州) 등에 9성을 쌓아 여진을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었고, 영평현(鈴平縣)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졌다. 영평은 파평(坡平)의 별호이므로 후손들이 파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윤관은 후에 벼슬이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대한민국의 성씨는 고려시대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대중화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성씨가 있던 양반의 비율은, 조선초기 10%이하 ~ 조선후기 50%이하이며 , 따라서 성씨가 없던 50~60%의 노비천민들은, 일제시대 1909년 일본의 성씨 부여 정책, 즉 민적법 시행으로 , 노비천민들도 마음대로 원하는 성씨와 본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비천민들은 족보에 올릴 조상들이 없었으니 , 생각해낸게 설화를 그럴싸하게 만들거나, 과거 중국의 유명인물이나 한반도에서 유명한 인물들을 끌어다가 , 자기족보에 선착순으로 올려서 성씨와 본관을 이어붙이는 행위가 성행하였고 , 이러한 족보세탁 작업중에 조상이 서로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많아 , 어쩔 수 없이 생면부지의 사람(노비천민들끼리)들끼리 족보를 합쳐서 같은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 합본행위도 성행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조선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성씨들만 진짜 양반성씨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고려왕건이나 조선왕조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성씨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