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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생활 ===
[[1916년]]봄 에 [[세브란스 병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올리버 알 에비슨]]으로부터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다. 스코필드 박사는 11월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으며, [[연세대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衛生學)을 강의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던 목원홍(睦源洪)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하였다.
 
====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강의 ====
[[1917년]]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또한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이름이다. 스코필드는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와 교제를 넓혔다. 그중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사회운동을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직으로 실천하던 [[이상재|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과 [[김정혜 (1868년)|김정혜]](金貞蕙) 여사를 존경하게 되었고, 특히 뒷날 김정혜 여사를 수양 어머니이자 사모(師母)로 섬겼다.
[[1916년]]봄 에 [[세브란스 병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올리버 알 에비슨]]으로부터 [[일제강점기]]의 [[한국]]으로 와 달라는 권유 서신을 받다. 스코필드 박사는 11월에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으며, [[연세대학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세균학]]과 [[위생|위생학]](衛生學)을 강의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던 목원홍(睦源洪)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강의하였다.
 
==== 한국이름을 짓다 ====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李甲成) 씨와 몰래 만났으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파악일을 맡게 된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이갑성씨의 의뢰에 따라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기도 하였으며,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 학살 사건|제암리]]에 가서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스코필드 자신의 표현대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떨리는 손'으로 촬영,〈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柳寬順), [[어윤희]](魚允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한다.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물론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획득 한국어 시험’에 합격한다. 또한 자신의 한국식 이름도 만들었는데, 바로 ‘석호필(石虎弼)’이다. 그의 성인 ‘石’은 그의 종교적 굳은 의지를 의미하고, ‘虎’는 호랑이, ‘弼’은 돕는다는 뜻으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낸 이름이다. 스코필드는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와 교제를 넓혔다. 그중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사회운동을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직으로 실천하던 [[이상재|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과 [[김정혜 (1868년)|김정혜]](金貞蕙) 여사를 존경하게 되었고, 특히 뒷날 김정혜 여사를 수양 어머니이자 사모(師母)로 섬겼다.
 
==== 3.1운동에 참여하다 ====
[[1919년]] [[2월 5일]]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李甲成) 씨와 몰래 만났으며,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파악일을 맡게 된다. 또한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하는 [[민중]]들과 일본의 시위자에 대한 탄압을 이갑성씨의 의뢰에 따라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리기도 하였으며, 4월에는 수원군 [[제암리 학살 사건|제암리]]에 가서 일본군이 제암리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고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스코필드 자신의 표현대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로)떨리는 손'으로 촬영,〈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또한당시 5월스코필드는 [[일본인]]이사진을 운영하는찍고 영자신문보고서를 'Seoul작성하여 Press'일제의 지에만행을 서대문고발하는 형무소에일과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함께, [[유관순]](柳寬順), [[어윤희]](魚允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한다.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물론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학살에서 일본에서살아남은 간섭할이들을 위로하는 없었기일도 때문이었다했다.
 
==== 일제의 만행중지를 호소하다 ====
또한 5월 [[일본인]]이 운영하는 영자신문 'Seoul Press' 지에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글을 올리고 당시 노순경, [[유관순]](柳寬順), [[어윤희]](魚允姬), 엄영애 등이 갇혀있던 서대문 형무소(여자 감방 8호실)를 직접 방문한다. 수감자에 대한 [[고문]] 여부를 확인한 뒤 하세가와 총독과 미즈노 정무 총감 등을 방문하여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의 중지를 호소하였다. 물론 그가 활발한 독립운동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일동맹]]으로 영국계 캐나다 사람인 스코필드를 일본에서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캐나다로 돌아가다 ====
[[1920년]] [[3·1운동]] 견문록 원고의 제목을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라고 붙였다. 그해 4월, [[강도]]를 가장한 스코필드 암살미수 사건이 그의 숙소에서 일어나, 그 달 학교와의 근무 계약을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캐나다]]에서도 [[한국인]]을 열심히 도왔고, [[1926년]], [[한국]]에 일시 방문하였다.
 
=== 한국에 돌아오다 ===
[[1958년]]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 13주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스코필드를 초빙하였다.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일하기를 자원하여 수의병리학을 맡았다.
 
[[1959년]] [[한국일보]]에 [[2·4정치파동]]에 관한 소견을 기고하였다. 집안일을 정리하려고 캐나다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9월에 돌아왔다. 남북미와 유럽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스코필드 기금(The Schofield Fund)”을 설치하여 그를 도왔다.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쓰거나 교육 장려 활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4월 12일]] 대한민국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별세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업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