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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대구 남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선거에 출마하기전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공천여부를 먼저 타진한 결과 이승만으로부터 "무소속으로 출마하는게 좋겠다"는 언질을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자신의 집에 찾아온 대구남부경찰서장이 거절하는데도 억지로 돈봉투를 주고가는등 관변의 우호적 분위기에서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당시 그의 상대후보는 자유당 창당시 3대주역이었던 배은희(2대국회의원, 목사, 대구 달성출신)자유당 후보와 현역의원이었던 서동진 민주당 후보였다.특히 배은희는 2대국회의원시절 부산 임시수도에서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시도하자 소수의 이승만 지지의원들이 은밀하게 만난 부산 삼우장 회동에 참석하는등 이승만 골수지지자였으나 이때는 자유당의 새로운 실력자였던 이기붕에 의해 밀려나는 형국이었다.신도환은 당선후 이승만의 절대적 후원으로 이기붕이 맡고있던 대한체육회장의 직무대리를 맡아 스포츠계에서도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였고
이듬해에는 전 국방장관 김용우의 후임으로 관변단체인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직에 취임하는데 후일 이 반공청년단의 서울종로 특별단부 회원이라고 주장하는 정치깡패 임화수와 유지광의 화랑동지회 조직원들이 [[3·15 부정선거]]당시 항의하는 학생시위대를 폭행하게 되었는데 4ᆞ19 후에 경찰에 체포된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는 중앙단부의 지시에 따른것이라 주장하여 단장 신도환이 폭행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신도환은 자신은 데모대 폭행을 지시한 적이 없고 반공청년단에는 종로 특별단부가 없다면서 이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등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신도환은 이들이 자유당에 잘보이기 위해 도넘은 개입을 해놓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것이라 주장하였다.이때 신도환의 변호인은 그와 일본 명치대 법대 동기인 유병진 변호사였는데 유 변호사는 서울지방법원 판사시절인 1958년 간첩죄로 기소된 조봉암의 1심
체육인으로서 체육활동에도 힘썼고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1979년), 범태평양유도연맹 회장(1980년), 유도고단자회 회장(1993년), 대한체육회 고문(1993년), 체육인동우회 이사장(1993년)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는 한국의 유도발전에 힘쓴 공로로 유도 10단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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