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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나 [[유도]] 명문학교로 알려진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엔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후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한 후원으로 [[도쿄대학]] 법학부를 수료하였고 다시 이승만의 특명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법 과정에 입교해서 공부하던 도중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거귀국하여 어머님의 임종과 초상을 치룬뒤에 얼마남지 않은 4대 국회의원총선에 입후보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대구에 눌러앉았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대구 남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선거에 출마하기전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공천여부를 먼저 타진한 결과 이승만으로부터 "무소속으로 출마하는게 좋겠다"는 언질을 받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자신의 집에 찾아온 남대구경찰서장이 억지로 돈봉투를 주고가는등 관변의 우호적 분위기에서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당시 그의 상대후보는 자유당 창당시 3대주역이었던 배은희(2대국회의원, 목사, 대구 달성출신)자유당 후보와 현역의원이었던 서동진 민주당 후보였다.특히 배은희는 2대국회의원시절 부산 임시수도에서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시도하자 소수의 이승만 지지의원들이 은밀하게 만난 부산 삼우장 회동에 참석하는등 이승만 골수지지자였으나 이때는 자유당의 새로운 실력자였던 이기붕에 의해 밀려나는 형국이었다.신도환은 당선후 이승만의 절대적 후원으로 이기붕이 맡고있던 대한체육회장의 직무대리를 맡아 스포츠계에서도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였고
신도환은 당선후 이승만의 절대적 후원으로 이기붕이 맡고있던 대한체육회장의 직무대리를 맡아 스포츠계에서도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였고 이듬해에는 전 국방장관 김용우의 후임으로 관변단체인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직에 취임하는데 후일 이 반공청년단의 서울종로 특별단부 회원이라고 주장하는 정치깡패 임화수와 유지광의 화랑동지회 조직원들이 [[3·15 부정선거]]당시 항의하는 학생시위대를 폭행하게 되었는데 4ᆞ19 후에 경찰에 체포된 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는 중앙단부의 지시에 따른것이라 주장하여 단장 신도환이 폭행을 사주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신도환은 자신은 데모대 폭행을 지시한 적이 없고 반공청년단에는 종로 특별단부가 없다면서 이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등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신도환은 이들이 자유당에 잘보이기 위해 도넘은 개입을 해놓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때 신도환의 변호인은 그와 일본 명치대 법대 동기인 유병진 변호사였는데 유 변호사는 서울지방법원 판사시절인 1958년 간첩죄로 기소된 조봉암의 1심 재판장을 맡아 주요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하고 사소한 혐의에 대해서만 징역5년을 선고하였다.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였고 유 판사는 괴청년들로부터 협박을 받는등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 되자 그의 대학동기이며 당시 현역의원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신도환에게 찾아왔다.신도환은 피신해온 유병진에게 자신이 임시숙소로 쓰던 사보이호텔의 안전한 객실을 제공하는 등 그의 은신을 도와주었는데 유병진은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그의 무죄를 위해 변호인을 맡아 백방으로 뛰었고 결국 신도환은 함께 기소된 다른 일부 피고인들과 더불어 1심을 맡았던 서울지방법원(재판장 장준택 부장판사)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검찰은 선고결과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장면 정부의 조재천 법무장관은 "법원이 4.19를 모독한훼손한 원흉들에게 너무 엄밀한 증거주의의 잣대를 들이댄다.향후 국사범이나 다름없는 이들의 처벌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은 집권당인 민주당의 내분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졌고 무죄 선고자에 대한 검찰의 항소도 불구속상태의 재판이라 쉽게 항소심이 열리지 않고 질질 끌던 상태에서 어느날 갑자기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혁명재판에 의해 신도환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후 총 8년3개월의 옥살이 끝에 특별감형되어 풀려난 뒤 [[1971년]] [[대한민국 제8대 총선|8대 총선]]에서 유진산의 후원으로 [[신민당 (1967년)|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에 성공했고 그후 1974년 유진산이 암으로 사망할때까지 당 사무총장을 맡게 된다. 그 후 [[대구 남구의 국회의원|대구 남구]]에서 9대, 10대, 12대 등 추가로 3선을 하게 되어 토탈 5선을 기록했으나 [[신한민주당]] 총재로 재임하던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총선|13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풀려난다.
출소후 한동안 신도환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게 된다.별다른 수입원도 없어 집에 쌀과 연탄이 떨어지고 딸들이 학교갈 차비가 없어 곤란을 겪는 상황인데도 특별히 오라는데도 갈 곳도 없이 무기력한 날들의 연속이었다.서울에 있기가 괴로워서 고향에 내려가면 뭔가 일거리가 있을까 하여 대구에 내려가 몇개월을 있었으나 거기서도 특별히 할 일
이 있지는 않았다.무슨 사업을 하려해도 경험도 자신도 없어 쉽게 엄두가 나지않았다. 결국 다시 서울에 올라와 구 자유당 동료의원 출신들과 어울려 바둑과 낚시 등으로 소일하게 된다.그러던 중 박정희 정권이 3선개헌을 위해 무리수를 두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당시 제일야당 신민당은 각계각층에 당의 문호를 개방하였는데 이때 신도환을 포함한 구 자유당계 전직의원 약40명이 신민당에 입당하게 되는데 이들의 대표격이던 전 국회부의장 이재학(강원도 홍천, 2ᆞ3ᆞ4ᆞ5대 국회의원,사사오입 개헌 제안자)은 신민당 당수 유진산에게 자신들 몫으로 당 정무위원1석을 요구하였고 유진산이 응락하자 그
자리에 신도환을 추천하였다.그러나 유진산은 마지막에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신도환 몫이었던 정무위원에 최용근 의원을 임명하였다.이에 신도환은 배신감을 느끼고 한밤중에 유진산 댁으로 찾아가 유진산에게 극언을 퍼부으며 항의하였으나 오히려 유진산이 의연한 모습으로 사과한 뒤 그 불가피한 사정을 차분히 설명하고 자신에게 "시장할 테니 식사라도 하고 가라"며 굳이 사양하는데도 억지로 밥상을 차려주는 지극정성에 서운한 감정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오히려 진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그는 평소 잘 몰랐던 진산이지만 그때부터 인간적인 친숙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1971년 8대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이 진산의 당권을 빼앗기 위해 "유진산이공화당 정권으로부터 3억을 받아먹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당원들로부터 진산의 자택이 습격당해 쑥대밭이 되는등 김대중의 흉계에 의해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한 진산을 끝까지 지켜주었다.마침내 김대중은 당의 공식회의에서 유진산에게 고개숙여 사죄했고 유진산은 당수로서의 권위를 회복했다. 그 후 유진산은 신도환을 당 사무총장에 임명하였다. [[1971년]] [[대한민국 제8대 총선|8대 총선]]에서 유진산의 후원으로 [[신민당 (1967년)|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재기에 성공했고 그후 1974년 유진산이 암으로 사망할때까지 당 사무총장을 맡게 된다. 그 후 [[대구 남구의 국회의원|대구 남구]]에서 9대, 10대, 12대 등 추가로 3선을 하게 되어 토탈 5선을 기록했으나 [[신한민주당]] 총재로 재임하던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총선|13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체육인으로서 체육활동에도 힘썼고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1979년), 범태평양유도연맹 회장(1980년), 유도고단자회 회장(1993년), 대한체육회 고문(1993년), 체육인동우회 이사장(1993년)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는 한국의 유도발전에 힘쓴 공로로 유도 10단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