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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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련은 [[사증|비자]]와 [[여권]] 발행 대리업무를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구로서,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는 명목 하에 과세감면조치를 받고 있었으나,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의 방북 시 납치문제에 관여하였음을 인정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내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조직과 시설에 대한 우대조치가 재검토되게 되었다. 도쿄 도의 고정자산세 감면조치 철폐 발표 후, 조선총련 시설이 ‘사적 시설이며, 대일·대남 공작기관이다’라는 현상에 관심이 향해지게 되었다.
 
2009년 현재, 전국 130개 지자체 가운데 전액감면하고 있는 지자체는 홋카이도 쿠시로 시 뿐이다. 또한 70% 이상의 지자체가 ‘무감면조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쿄 도의 조선총련 중앙본부의 부동산에 대한 고정자산세 등의 과세처분을 둘러싸고 등기상의 부동산 소유자인 합자회사 ‘조선중앙회관관리회’가 도쿄 도에 과세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여 제소하였다. 1심과 2심은 청구를 기각하였다. 2009년 8월 12일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여 총련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ref>[http://sankei.jp.msn.com/affairs/trial/090812/trl0908121556008-n1.htm 課税訴訟で総連側の敗訴確定 最高裁] {{웨이백|url=http://sankei.jp.msn.com/affairs/trial/090812/trl0908121556008-n1.htm |date=20090813111131 }} 『産経ニュース』 2009年8月12日更新、同日閲覧</ref>
 
=== 일본 정당과의 관계 ===
조선총련 창립 이전에 재일조선인이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였던 적도 있어서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가 깊었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사회당]]에도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쌓았다. 일본사회당 좌파를 계승한 [[사회민주당]]과는 계속 우호관계에 있다. 사회당 출신의 민주당 의원에게 정치헌금을 했던 것도 판명되었다<ref>杉本修作 (2007年1月16日). “[httphttps://web.archive.org/web/20070127204245/http://www.mainichi-msn.co.jp/seiji/feature/news/20070116k0000e010066000c.html 角田参院副議長:陣営が寄付2517万円を「裏金処理」]”. 毎日新聞. 2007年1月27日閲覧</ref>.
 
=== 지방 참정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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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학교 수업료 무상화에 대한 공작활동 ===
2010년 6월 12일, 조선총련이 조선학교 학부모들에게 문부과학성에 조선학교의 고등학교수업료 무상화를 요청하는 전화공세를 걸도록 할당량을 부과하였던 것, 또한 동시에 여러 명의 일본인 행세를 하여 전화횟수를 늘리도록 지시하였던 것이 내부문서에서 밝혀졌다. [[산케이 신문]]은 “총련의 무상화운동이 도덕성을 크게 일탈하였으며, 북한처럼 통제된 조직동원의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실태가 명백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ref>[http://sankei.jp.msn.com/world/korea/100613/kor1006130120000-n1.htm 総連、朝鮮学校無償化へ攻勢 「日本人になりすませ」 文科省への電話指示、ノルマも] {{웨이백|url=http://sankei.jp.msn.com/world/korea/100613/kor1006130120000-n1.htm |date=20100614074331 }} 「産経ニュース」2010年6月13日</ref>.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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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치사건 관여 ===
1973년 행방 불명된 [[사이타마현]] [[가미후쿠오카 시]] (현 [[후지미노 시]]) 여자의 조선족 아동 2명이 납치(2아동납치사건)되었는데, 그 여성의 남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이었고, 게다가 그 남편이 근무하였던 도쿄 무역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전직 여직원이 경찰당국의 조사에서 ‘북한 본국의 판단을 요청했다’ 등으로 진술하였다<ref>[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10AT1G0902X09042007.html 拉致、北朝鮮が指示か] Nikkei Net 2007年4月10日</ref>. 일본 정부는 조선총련의 개입을 분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ref name="a">[http://www.shugiin.go.jp/itdb_shitsumon.nsf/html/shitsumon/b166475.htm 内閣衆質一六六第四七五号平成十九年七月十日] {{웨이백|url=http://www.shugiin.go.jp/itdb_shitsumon.nsf/html/shitsumon/b166475.htm |date=20110324062009 }} 平成十九年七月三日衆議院議 員河村たかし提出の「公安調査庁に関する質問主意書」に対する日本国政府の答弁書 衆議院</ref>.
 
* 1978년 6월 발생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ref name="a" />.
* 1980년 6월 발생한 [[신광수 (1929년)|신광수]](辛光洙) 사건(하라 다다아키(原敕晁)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ref name="a" />.
 
2007년 4월 25일 경찰청 공안부는 가미후쿠오카 시 사건에 관하여 국외이송목적 유괴 혐의로 사건에 관여하였던 혐의가 강한 공작원들이 한때 활동에 참가하였던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 중앙본부’(유학동) 등 조선총련 산하단체와 관련단체 등 4개소를 가택수색하였다<ref>[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25AT1G2500925042007.html 拉致事件で警視庁が初捜索·朝鮮総連系団体] Nikkei Net 2007年4月25日</ref>. 수색시 재일 조선인 남성이 공무집행방해로 체로되어 도미사카(富坂)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당시 혐의사실 고지는 하지 않았음), 5월 말 불기소처분되어 석방되었다<ref>「[http://www.kinyobi.co.jp/KTools/antena_pt?v=vol657 金曜アンテナ] {{웨이백|url=http://www.kinyobi.co.jp/KTools/antena_pt?v=vol657 |date=20070927045846 }}」 週刊金曜日2007年6月8日号</ref>. 이에 관하여 가택수색 당시 수사관이 진입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으나 TV에는 보도되지 않았었다.
 
또한 공안부는 도쿄 도내 무역회사에 다수의 공작원이 입사한 경위 등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조선총련 서만술 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남승우 부의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기 위해 같은 날 서면으로 출석을 요구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6일 고덕우 부의장이 보도용 기자회견에서 거부하는 취지를 발표하였다<ref>[http://www.nikkei.co.jp/news/shakai/20070426AT1G2601126042007.html 朝鮮総連、2児拉致での聴取要請を拒否] Nikkei Net 2007年4月26日</ref>.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주장 ====
1973년 재일조선인자제 실종사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아베 신조 정권]]이 일련의 일본인납치사건에 결부시킨 정치적 민족 탄압’이라고 주장하였다<ref>[http://www1.korea-np.co.jp/sinboj/j-2007/02/0702j0425-00001.htm 朝鮮総聯中央本部広報室の強制捜索に関するコメント] {{웨이백|url=http://www1.korea-np.co.jp/sinboj/j-2007/02/0702j0425-00001.htm |date=20070429151717 }} 朝鮮新報 2007年4月26日</ref>.
 
=== 대대한민국 공작 협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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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동해의 노래’ ===
귀환사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총련이 공동제작한 영화 ‘[[동해의 노래]]’(2부작)가 2009년 12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영되었다<ref>[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05-00001.htm 朝鮮国内で大反響] {{웨이백|url=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05-00001.htm |date=20140226234257 }}, 朝鮮新報, 2010.2.5.</ref><ref>[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12-00003.htm 同胞愛の結晶、好評上映中の映画「東海の歌」 監督、出演者、独占インタビュー] {{웨이백|url=http://www1.korea-np.co.jp/sinboj/j-2010/06/1006j0212-00003.htm |date=20140226234259 }}, 朝鮮新報, 2010.2.12.</ref>. 영화는 주인공의 모델이 된 한덕수 前의장을 비롯한 제1세대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이국땅에서 ‘애국’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계기가 된 김일성 노선전환방침(1952년)과 총련 결성,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인한 민족교육의 발전과 귀국 실현까지 1940~50년대 재일조선인운동의 주된 사건을 그렸다.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왔던 한덕수 前의장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구체적 업적과 생애 및 재일조선인의 활동에 관한 홍보작품이기도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첩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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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에서도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던 사실이 밝혀졌는데, 2007년 6월부터 2008년 5월까지 3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최장 2개월 이상 체류하였다. 기소장에는 일본 협력자로 조선총련 산하단체 간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과 ‘사장’ 직함을 가진 오사카 거주 인물 등 2명의 실명이 기소장에 기재되었다.
 
기소장에 올려진 산하단체 간부는 ‘조선총련 관계 단체 간부로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피고와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보위부에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전혀 관계가 없다. 멋대로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라며 관련을 부정하였다<ref>“[httphttps://web.archive.org/web/20080902025034/http://www.yomiuri.co.jp/national/news/20080830-OYT1T00395.htm?from=main2 北の女スパイ日本で暗躍、指令「総連傘下団体幹部に会え」]”. 読売新聞. 2008年8月30日閲覧</ref>.
 
=== 연평도 포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