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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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척들과의 갈등 ===
[[1478년]] [[4월 9일]] [[주계부정]] 이심원이 [[세조]] 때의 훈구파 대신을 기용하지 말 것을 상주했다. 같은 날 그가 돌아가자 도승지 임사홍은 [[성종]]에게 상소하기를 조신들이 말을 쉽게 한다고 지적했다. [[4월 일이1일]] 커져서흙으로 된 비가 내리자 [[4월 7일]] 언관들이 이를 재앙이라고 주장하며 왕은 근신하고 술도 마셔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4월 21일]]과 [[4월 28일]] 임사홍은 겨우 황사 때문에 근신하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반박했다.

이런 이유로 임사홍은 간관들에게 여러번 공격을 당했다. 1478년 [[4월 28일]] 대사헌 유지(柳輊)가 그의 발언에 대해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로서 총명(聰明)을 막고 덮으며 대간을 저해하고 억제한다고 지적한 이후 그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고, 성종은 홍문관·예문관에서 임사홍이 소인임을 알고도 말하지 않았다며 국문을 가했다.
 
[[4월 29일]] [[주계부정]] 이심원은 임사홍과 그의 아버지 [[임원준]]을 탄핵하면서 임사홍이 신의 숙모부(叔母夫)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아는데, 참으로 소인이라 하면서 언관들의 파면이 부당하다고 상주했다. 동시에 성녕대군의 양자 원천군이 정실에게는 아들이 없고 첩에게만 아들이 있었다. [[임원준]]이 [[성녕대군]] 집의 재산이 많은 것을 알고 원천군의 서자 대신 보성군을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양시키려던 것도 지적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인 4월 29일 보성군 이합이 직접 가서 임사홍의 편을 들면서 대죄하였다. 성종은 같은 날 이심원과 임사홍, 임원준을 불러 대질심문을 시키기도 했다. 뒤에 보성군 합은 [[주계부정]] 이심원을 불효죄로 고소하여 사건이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