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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량'''(元俊良, ?년 [[12월 18일]] - ?년 [[1월 27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군인, 정치인으로 [[임진왜란]] 때의 장군 [[원균]], 원연, 원용의 아버지이자 [[원사웅]], [[원사립]]의 조부였다. 자(字)는 수부(秀夫), 본관은 [[원주 원씨|원주]]이다.
 
[[1538년]](중종 33) 알성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춘추관기사관,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6년 훈련원습독관 재직 시 중시무과에 을과로 급제해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관직은 수경상좌병사(守慶尙左兵使)에 이르렀고, 사후 아들 [[원균]]의 [[임진왜란]] 당시 훈공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경기도]] [[평택군|진위]]현 출신.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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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1538년]](중종 33) 알성시(謁聖試) [[무과]]에 급제하여 [[1544년]](중종 39) [[선전관]]이 되고, 그 해 임금으로부터 군령(軍令)을 엄중하게 지키지 못하고 군정(軍政)이 문란해졌다며 질책을 받았다. 이후 [[춘추관]][[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1546년]](명종 2) [[훈련원]]습독관(訓鍊院習讀官)으로 재직 중 중시(重試) 무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탐화랑(探花郞)을 받고 당상관으로 승진, 이후 [[절충장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548년]](명종 4) [[10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고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부임했다가, [[1549년]] [[6월]] 체직되었다.<ref>강원도춘천부선생안(江原道春川府先生案)</ref> 다시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8월 28일]]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