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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서 경략설 ====
백제가 동아대륙의 [[랴오시|랴오시 지방]]에 진출했었다는 이른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역사서)|양서]]》 등의 다수의 남조계 사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초기에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있었지만<ref>유원재, 〈"백제 략유(略有)요서" 기사의 분석〉, 《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ref>,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입장이 제기되고대세가 되고 있다.<ref name=autogenerated1>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2003</ref>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공격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1990년 이후부터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다.
 
한편,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경략을 인정하는 편이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하]]와 [[장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의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요서 경략 시기는 [[진 (위진남북조)|진]](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요서에 진출할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수도 이다는 견해가 있고 이 일로 요서를 점령하여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견해도 보인다있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학자들도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 한편 요서 경략 시기에 대해 [[신채호]]는 [[근구수왕]] 때, [[정인보]]는 [[책계왕]]·[[분서왕]] 때, 김상기·김철준은 근초고왕 때로 보는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의 기병이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가 이를 물리친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학계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영토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기도주장하는 한다것이 지배적이다.또한 그러나학자들은 학계에서는북조의 사서에 기록의기록이 위나라를없어도 고구려의남조의 오기로다수의 보아사서에 인정하지정확히 않는기록되어 견해도있는 있으며,점과 또는남조의 같은기록이 기록에허위라면 백제중국의 측의사서의 전공으로신뢰성에 '선박을 쳐부순문제점이 생기는[拔臺舫]'을 들고그리고 있는삼국사기에 것으로김부식이 보아의도적이거나 위나라가혹은 실제로모르고 함대를기록을 보내누락했더라도 침공해대한민국에서 왔을일방적으로 것으로주장하는 보는역사적 견해도사실이 있는아니고 피해 논란이지역과 많은피해자측인 부분이다중국인이 요서를 점령당했던 사실을 은폐하지 않고 중국 사서에 기록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요서 경략설이 신뢰를 얻고 있다고 주장한다. <ref>이문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237쪽</ref>
 
=== 왜와의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