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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1591년]](선조 24년) 식년과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바로 [[임진왜란]]을 맞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장]]으로 [[영천]] 지역에서 거병하여 왜적에 맞서 싸웠다. [[1598년]](선조 31년) 전란이 종결되었으나 바로 부친상을 마친 뒤 [[1605년]](선조 38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6년]](선조 39) 여름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으로 나갔으나 만녕에 어머니 전주이씨가 병환이 잦자, 병중인 어머니를 생각하여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 [[김개시]] 등이 국정 운영에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이첨과 상궁 김개시의 목을 벨 것은 상소하고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가을 통훈대부로 승진, [[성균관]]전적에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으로 사직하고 낙향, 그 뒤 3년간 [[죽]]을 마시며 여묘살이를 하였다. 3년상 중에도 [[이이첨]] 등의 주도로 [[영창대군]]이 화의 근원이니 [[영창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나자, 그는 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3년상을 마쳤으며, [[1614년]] 옥사가 일어나 이이첨과 정인홍이 폐비를 주장하자 친어머니와 친동생은 아니지만 계통상 어머니와 아우의 관계이니 이를 헤아릴 것을 간하는 전은소를 올려 폐모살제의 불가함을 상소했다. 이후 정인홍, 이이첨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양선생변무소(兩先生辨誣疏)를 올려 [[이황]]과 [[이언적]]의 공적을 치하하며 [[이이첨]]과 [[정인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용문|8살의 동자로 대궐 안에서 깊이 지내는 [[영창대군]]이 생각하는 것이란,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인데 어찌 대궐 밖의 일을 알수가 있으며, 어떻게 간사한 일에 가담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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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광해군 10) 가을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친지의 주선으로 [[안동향교]]의 제독이 되고, 동년 겨울 [[상주향교]] 제독, [[1619년]](광해군 11) 진주향교 제독이 되었다.
 
주변에서 농담 삼아 "그대와 같은 고을 사람으로 출세하여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대는 왜 침체한가", "그 사람들 하는 데로 따르면 될 일이지 왜 주변 타령인가" 라고 하면 그는 대답을 않고 양심장을 펼쳐 보였다 한다. 그는 [[인수정]]에서 시문과 문인들 양성 외에 [[봉화군]] 도촌리 사제(沙堤)의 명정암(冥酊巖)을 산책하곤 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 정귄에서 불렀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감곡을 아호로 했다가 뒤에 모래로 불을 땐다, 늦은 나이에 고생스럽게 일을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뜻의 취사라는 호를 지어 아호로 삼았다.
 
고향의 향토사 정리에 뜻을 두어 여러 분야에 걸쳐 사료를 모으고 다듬어 편찬 준비를 해두었으며 [[1625년]](인조3) [[이산서원]]에서 향내 관계 인사의 모임을 주관하여 그 심의를 하고 서문까지 지었으나 간행을 못 보았다. [[1631년]](인조 9년) [[9월 28일]]에 질병으로 [[인수정]] 정침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76세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