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리치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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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게이초]] 20년 [[음력 5월 15일]]([[1615년]] [[6월 11일]])
|사망지 =
|개명 = 지쿠마마루(千熊丸) → 모리치카
|개명 =
|별명 = [[통칭]]: 우에몬타로(右衛門太郎)
|별명 =
|시호 =
|신호 =
|계명 = 領安院殿源翁宗本大居士<br/>蓮国一栄大禅定門
|세례명 =
|묘소 = [[렌코지 (교토부)|렌코지]]([[교토부]] [[교토시]])
|묘소 =
|관위 = [[궁내성|궁내소보]], [[도사국|도사]]노카미
|관위 =
|막부 =
|주군 = ([[조소카베 모토치카]])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리]]
|주군 =
|번 =
|씨족 = [[조소카베 씨조소카베씨]]
|부모 = 아버지: [[조소카베 모토치카]], 어머니: [[모토치카 부인]]([[이시카이 미쓰마사]]의 딸, [[사이토 도산]]의 동복 여동생)
|부모 =
|형제 = 형: [[조소카베 노부치카|노부치카]], [[가가와 지카카즈]], [[쓰노 지카타다]], 동생: [[조소카베 우근대부|우근대부]], [[조소카베 야스토요|야스토요]]
|형제 =
|아내 =
|자녀 = [[조소카베 모리쓰네|모리쓰네]], [[조소카베 모리타카|모리타카]], [[조소카베 모리노부|모리노부]], [[조소카베 모리사다|모리사다]] 등
|자녀 =
}}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도사국]] [[다이묘]]·[[무장]]이다. [[조소카베씨]] 제22대 당주(센고쿠 다이묘로서는 최후의 당주).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4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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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
=== 가독 상속 ===
[[덴쇼]](天正) 3년([[1575년]])에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아명은 '''지쿠마마루'''(千熊丸).
 
덴쇼 14년(1586년)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맏형 [[조소카베 노부치카|노부치카]](信親)가 죽고 또 다른 형 [[가가와 지카카즈]](香川親和)나 [[쓰노 지카타다]](津野親忠)를 추대하려는 세력과 가독 상속을 놓고 경쟁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아버지 모토치카의 지명을 받아 덴쇼 16년([[1588년]])에 세자(世子)로 지명되었다. 여기에는 [[기라 지카자네]](吉良親実)를 비롯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원래 모리치카는 형제 가운데서도 가장 오만하고 경솔한 성격이었기에 인망은 고사하고 혐오감을 품은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모토치카는 그런 혐오감을 드러내는 자들을 모두 처단해 버렸다). 그럼에도 모토치카가 어린 지쿠마마루를 세자로 지명한 이유로는 치카카즈와 치카타다가 다른 가계를 이미 잇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모토치카 자신이 누구보다도 아꼈던 아들인 노부치카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기에는 이들 두 사람이 나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토치카에 의해서 조소카베 가문의 후계자로 결정된 지쿠마마루는 [[도요토미씨]] 일문이 아닌 [[마시타 나가모리]]를 에보시오야(烏帽子親)로 원복(元服)을 행하고 그의 이름자 한 글자 「모리」(盛)를 따서 모리치카(盛親)라 하였고, 도요토미 정권 아래서 조소카베 집안의 격은 더욱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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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전임자=[[조소카베 모토치카]]
|후임자=[[시마 지카노리]]
|직책=[[조소카베씨|도사 조소카베가]] 당주
|대수=22
|임기=[[1599년]] ~ [[1615년]]
|}}
|전임자=[[조소카베 모토치카]]
|후임자=[[조소카베 모리쓰나]]
|}}
 
{{전거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