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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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에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그의 구 묘소가 있던 묘터(애제자 [[유상규]]의 묘소 뒷편)는 원형 보존되고 있다.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안창호를 추도하는 [[한자]]로 된 만시(晩詩)를 지어 일제 치하의 한국으로 보내 애도를 표했다.
* 그 뒤 [[윤치호]]와 [[이광수]],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되었고, 해방 뒤에도 [[김구]]의 귀국 이후, [[김구]],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광수]] 등에 의해 추도식이 계속 이어졌다.
* [[윤치호]]에 의하면 [[이광수]], [[현제명]], [[주요한]] 등은 안창호가 죽자 마자 등을 돌리고 [[조선총독부]]에 아첨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에도 [[흥사단]]과, 그를 존경하던 [[김성수 (1891년)|김성수]], [[장택상]], 그리고 한때 그의 수양동우회 회원이었던 [[조병옥]] 등에 의해 계속 추모 사업이 계속 이어졌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