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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메이 오키미의 시대에는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를 도호쿠 지방으로 보내어 에미시를 토벌하게 하는 등 지배권을 넓혔으나, 한편으로 정치 불안이 계속되어 [[658년]]에는 아리마노 미코(有間皇子)가 모반을 꾀하다 처형되기도 했다.
 
[[660년]], 왜의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백제]]가 나 ・ 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백제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661년]] 백제로의 구원병을 파병하는 것이 결정되고 사이메이 오키미와 나카노오에가 함께 지쿠시(筑紫)까지 나아가기도 했으나, 사이메이 오키미는 지쿠시에서 그만 서거하고, 백제에 보냈던 구원군도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나 ・ 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궤멸당한다.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멸망하고 대륙의신라의 공격 위협에 노출된 상태에서 나카노오에는 [[지쿠젠 국|지쿠젠]]이나 [[쓰시마 국|쓰시마]] 등지에 미즈키(水城)를 쌓고 사키모리(防人)나 봉수대를 설치하며, 오쓰 궁(大津宮)으로 천도하는 한편 기존의 부곡(部曲)을 부활시키고 호족간 융화를 꾀하는 등 국토 방위를 중심으로 국내 제도 정비에 힘을 쏟았다. 또한 이때까지 「칭제(稱制)」 형식으로 국정을 지휘하며 즉위식을 미루어오던 나카노오에는 668년 오키미로 즉위하였다([[덴지 천황|덴지 오키미]]). 670년에는 새로운 호적을 만들고(경오년적) [[671년]]에는 최초의 율령법전인 「오미령(近江令)」을 시행하였다.
 
671년에 덴지 오키미가 서거하고, 덴지 오키미의 동생 오아마노 미코(大海人皇子, 훗날의 [[덴무 천황]])와 덴지 오키미의 아들 [[고분 천황|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 사이의 불화로 [[672년]] [[임신의 난]]이 일어난다. 오아마노 미코는 이 난에서 승리하고 즉위하였으며, 최초로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형 덴지 오키미보다 더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