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 개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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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에서 다이카 개신이 높게 평가된 것은 [[에도 막부]] 말기 [[기슈 번]]의 중신(重臣)이었던 다테 지히로(伊達千広, [[무쓰 무네미쓰]]의 친아버지)가 『대세삼전고(大勢三転考)』를 저술하면서 처음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발견했고 그것이 메이지 시대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은 다이카 시대(645년에서 650년까지)에 한정되지 않고 고토쿠 오키미 및 나카노오에노 미코(덴지 오키미), 덴무 천황, 그리고 [[지토 천황]]의 전제 통치화를 통해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이라는 설이 요즘은 뿌리깊게 되어 있다.
 
*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는 쿠데타가 「삼한(三韓)의 사신이 조공을조공의 서를 바치는읽는 자리」에서 거행되었다는 점. 당시의 상식으로서는 외교 의식 도중에 [[쿠데타]]가 일어날 수가 없다(외국의 사절에게 「우리 나라는 현재 내분 중이다」 즉 지금이 자국을 도모할 절호의 기회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 또한 삼한의 사신이 온다고 이루카를 속여서 암살 현장으로 불러낸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허구를 당시 국가 정책의 중심에 있던 이루카가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ref>中村修也 『偽りの大化改新』(講談社、2006年)</ref> 다만또한 한인이 소가노 뒤의이루카를 백강구죽였다라고 전투로까지말한 이어지는면에서 움직임이의문점이 있었고있다.즉 당시의왜국은 정보날조된 전달망을신공의 생각하면삼한 정벌 빠른이야기로 시간에인해 중국이나삼한이 한반도그동안 관련조공을 국가들이하러 왜에서의오는 쿠데타를 알았을착각하였으나 가능성은삼한이 부정할보내온 글들이 없다.전혀 또한왜국이 이루카생각하던 자신이그런 불온한글들이 소식에아니였으며 대한그러한 정보를것에 얻었다소가노 한들이루카에 그것이친삼한적인 소가 씨에태도에 대한 불만이며분노가 일상적으로터져 나도는쿠데타가 소문이었다면일어났으며 굳이그래서 마음에"한인들 두지때문에 않고소가노 이루카가 방치했을죽었다"라고 가능성도말했다는 있다는유력한 지적도설이 따른다있다.
* 조칙을 공포한 날이 「봄 정월 갑자 초하루(즉 정월 초하루)」인 점. 연초에 조칙을 내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정월 초하루에 발포되었을 가능성은 적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 일본에서 「고오리」를 「郡」이라는 한자로 표기하는 것은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제정된 뒤의 일로, 그 이전에는 「評」을 사용한 것을 목간 등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