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백 (1905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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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원인 = [[총살]]
|매장지 =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신미리 애국열사능 (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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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선중앙일보』를 창간한 데 이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이나 되는 신문들을 경영하여 선전공작에 이용하였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 결성을 지원하였고, 같은 해 겨울 김일성을 만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에 대해 논의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서 실무역할을 담당했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였다.
 
=== 체포와 사형 ===
서울의 경찰 및 여러 군수사 기관에서는 1949년 즈음부터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특수지원과 자금을 받아, 남한의 주요 기관에 비밀공작원을 잠입시켜 기밀을 빼내는 등의 여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수사 기관들은 이러한 것들을 적발해 오던 와중,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가 바로 핵심 기관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1950년]] 2월경부터 남한의 정보당국은 본격적인 내사를 시작하여, 2월 10일에 남반부정치위원회의 본거지를 파악하고 최고 부책임자인 김명용(金明用)을 체포하고, 조직문건의 일부와 각종 기밀정보, 관계서류등을 확보하였다. 서울지방검찰청은 같은 달 12일 비밀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수사총지휘자로 오제도(吳制道) 부장을 임명, 각 수사반을 편성하고 수사를 개시하였다.
[[1950년]] [[5월 15일]], 오전 3시,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의 최고책임자였던 성시백은 [[서울시]] 종로구 효제동에서 체포되었다.<ref>1950년 5월 26일, 경향신문</ref>
 
그는 같은 해인 1950년 6월, 군사재판에서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음 날인 27일 처형당했다.
 
== 사후 ==
=== 가묘 ===
그는 [[대한민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 날 총살 당했다. 그의 시체는 [[한국전쟁]] 이후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묘만 존재하며, 가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능에 위치해 있다. 그의 묘비에는 '성시백 동지'란 이름 아래에 '남조선 혁명가'라고 쓰여져 있다.<ref>국방TV, <북한 도발사 4부, 은밀한 침투, 간첩></ref>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