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양군 (148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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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양군 이회(益陽君 李懷, [[1488년]] [[7월 1일]] ~ [[1552년]] [[1월 20일]])는 [[조선]] 전기의 왕자, 왕족으로 이름은 회(懷), 자는 순지(順之)이고,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조선 성종|성종]]의 아홉번째 서자이며, 어머니는 [[숙의 홍씨 (조선 성종)|숙의 남양홍씨]](淑儀洪氏)이다.
 
[[연산군]]이 [[안양군]]과 [[봉성군]]을 죽이자 일부러 멍청한척 하면서 화를 모면하였다. [[중종 반정]] 후 [[정국공신|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에 책록되고 [[종부시]]제조, [[종친부]]유사당상 등을 지냈다. [[홍일동]]의 외손자로, [[홍길동]]은 그의 서외종조부가 된다. 인조 때 [[의순공주]]를 대신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던 금림군 이개윤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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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성종 26) 7세의 나이에 아버지 [[조선 성종|성종]]이 사망하였다. 입궐하여 [[1496년]](연산군 2) 익양군에 봉작되었고, 영일정씨와 가례를 올린 뒤 출궁하였다. 연산군이 이성을 잃고 [[안양군]]과 [[봉성군]]을 때려죽이면서 다른 이복형제들도 더욱 미워하거나 의심하자 그는 두문불출하고 거짓으로 바보 흉내를 내며 우매한 척 행동하고 의심을 모면하였다. [[숙의 홍씨 (조선 성종)|숙의 남양홍씨]]의 다른 아들들은 연산군 때 화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의심과 화를 모면한다.
 
[[1506년]](연산군 15) [[중종반정]]에 협력하여, 반정이 성공하자 그해 말 [[정국공신|정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문소전제조(文昭殿提調), 연은전제조(延恩殿提調), 종부시제조(宗簿寺提調)를 겸임하고,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임하였다. [[1510년]] 모친상을 당하자 사직하고 3년상을 마쳤으며 [[1513년]](중종 7) 다시 익양군의 작위와 문소전, 연은전, 종부시 제조직과 종친부 유사당상직에 제수되었다. 사망 후 바로 순평(順平)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1533년]](중종 28) [[11월]]에는 그가 병인 산증(疝症)이 심해져 고생하자 중종이 직접 [[내의원]] 의원을 보내어 진료하게 하기도 했다. [[1552년]] [[1월 20일]] 사망했다. 그가 죽자 중종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였다.
 
=== 사후 ===
사망 후 바로 순평(順平)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시신은 [[파주군]] 남면 오리동(南面五里洞) 기곡(基谷)마을(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묘좌(卯坐)에 부인 연일정씨 묘소 오른쪽에 쌍분으로 매장되었으며, [[신도비]]문은 [[의정부]][[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이 짓고, 주부 [[한호]](韓濩)가 글을 썼으며, [[직제학]] [[김응남]](金應南)이 비석에 새겼다.
 
묘소와 묘비, 신도비 등은 [[1984년]] [[10월 25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되고 [[1987년]] [[8월 17일]] [[파주군]]청에서 묘소를 재정비한 뒤 비각을 세웠다. [[한성부]]에 사당 순평사가 세워졌으나 [[대한민국]]에 와서 [[1965년]] 묘소인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 터골 묘 아래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