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몽: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밀키 (토론 | 기여)
잔글 내용추가
밀키 (토론 | 기여)
잔글 내용추가
24번째 줄:
[[고려]] 초기 [[전라남도|전남]] [[영암군|영암]] 출신 관료로 [[고려 태조|태조]]~[[고려 성종|성종]]조의 왕권 안정에 공을 세웠다. 또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건의 부름을 받았다. 고려 건국 이전에는 [[고려 태조|태조]]가 [[후삼국 시대|후삼국]]을 [[통일]]할 것을 예지하였다.
 
[[고려 혜종|혜종]]의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을 암살의 위기에서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혜종 사후 극심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왕건의 "공주강 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가 있었음에도 중용된 것을 볼 때, 선왕 혜종을 배신하고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정종 (3대)|정종]]의 추종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광종|광종]] 말년에 왕권 강화책에 따라 벼슬에서 퇴출되었다가 [[980년]]([[고려 경종|경종]] 5년)에 임금에게 왕승이 반역을 꾀할 것을 대비하게 하였다. 이 사건 이후 임금은 최지몽에게 어의와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했다. 또한 대광내의령 동래군후 식읍일천호 주국(大匡內議令東萊郡侯食邑一千戶柱國)에 봉해지고 복직되었다. 성종 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태자태부로 증직되고 민휴(敏休)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고향에는 지금도 사당이 남아 있어 그를 모시고 있다.
 
==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