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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생애: 동가씨는 황귀비가 된 적이 없고 동악씨는 궁녀 출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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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베이징|북경]] [[자금성]]의 동쪽 후궁 동육궁 중 하나인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 [[효강장황후|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ref name="청사고6"/>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이라,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다.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말을 타면서 토끼를 바로 쏘아 맞히는 등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효장문황후|소성태후]]의 총애를 받았다.<ref group="주">[http://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6 청사고 본기 권6 聖祖本紀一 ] 에서는 다음과 같이 협엽의 영민함을 기록하고 있다. 天表英俊,嶽立聲洪。六齡,偕兄弟問安。世祖問所欲。皇二子福全言:「原爲賢王。」帝言:「原效法父皇。」世祖異焉。</ref> 5살 때부터 제대로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우는데, 인시(寅時, 새벽 4시)에 일찍 일어나 부황과 조모 그리고 적모(嫡母)인 황후, 모비에게 문안을 올리고 진시(辰時, 아침 8시)에 나가 밤늦은 술시(戌時, 저녁 8시)까지 문연각에서 스승의 지도 아래 공부하였다.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ref group="주">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순치제가 제일 총애하던 현비 동악씨의 소생이었으며 [[1657년]](순치 14년)에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나 [[1658년]](순치 15년)에 요절하고 난 뒤에 영친왕(榮親王)으로 추봉, 곧 황태자로 정식 추봉되었다.</ref> 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가 승은공 동도라의 딸로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모든 후궁들 중 품계도 가장 높았으며<ref>두산동아, 다산문선, {{ISBN|9050068050}}, 1299쪽</ref>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는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순치제는 억지로 혼인한 효혜장황후를 멀리하였고 오히려 궁녀 출신의 [[동악비|동악씨]]를 총애하여 현비(賢妃)로 삼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가 사는 승건궁(承乾宮)을 찾았다.<ref>바이하이진, 김문주 역, 《여왕의 시대:역사를 움직인 12명의 여왕》,미래의 창, 2008년, {{ISBN|89-5989-090-1}}, 281-282쪽</ref>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며 다행히 얼마 안 되어 나았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동악씨는 결국 차도가 보이지 않고 죽자 순치제는 즉시 동악씨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순치제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동악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