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케후 마사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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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역 시절부터 야구계 굴지의 자동차를 아주 좋아하는 일명 ‘애차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 자동차뿐만 아니라 모형차와 라디콘카도 좋아했고 자신의 커스텀카에 번호표지를 31개나 달았을 정도였다. 현역 시절에는 차 내부를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 중요시했고 독신 시절에는 차고에 차를 넣고 잠시 앉았다가 합숙소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 현역 시절에는 [[미쓰와 타이거]]가 제조·판매하는 ‘호랑이표’({{lang|ja|虎印}}) 브랜드의 방망이와 글러브를 애용했다. 이 회사의 어드바이저리 스태프로서 일이 있을 때 마다 매번 장인에게 섬세한 주문을 하면서도, 야구 용품 회사로서의 기술이나 대응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1985년에는 시즌을 앞둔 2월 20일에 미쓰와 타이거가 파산한 후에도 시즌 종료 때까지 ‘호랑이표’ 방망이를 사용했다. 그러한 경험으로 해설자나 한신의 타격 코디네이터로 변신한 이후에도 야구 장비를 제대로 다뤄야 한다고 젊은 선수들에게 요구했다. 참고로 한신의 타격 코디네이터로 부임한 직후에는 ‘호랑이표 부활’이라고 새긴 미쓰와 타이거(파산 후에 새로 설립한 회사)의 기자 발표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이름이 씌여진 복각 모델의 제조·판매에 PR 역할을 했다.<ref>[http://www.sponichi.co.jp/baseball/news/2013/12/17/kiji/K20131217007216990.html {{lang|ja|「こだわりの強い男」掛布DC 復活、虎印バットに感謝}}] {{웨이백|url=http://www.sponichi.co.jp/baseball/news/2013/12/17/kiji/K20131217007216990.html |date=20131225080140 }} - 스포츠 닛폰, 2013년 12월 17일</ref>
* 현역 시절인 1985년부터 채무 처리에 관한 논란(자세한 것은 [[가케후 마사유키#채무 문제|채무 문제]]를 참조)이 언론에 보도된 시점인 2009년 무렵까지는 [[부업]]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그 계기는 미쓰와 타이거의 파산으로 재취업할 곳을 전전하던 전직 사원에 대한 일시적인 조치로서 [[오사카부]] [[도요나카 시도요나카시]]의 자신의 자택 근처에 위치한 스포츠 캐주얼 용품점인 ‘스포츠 하우스 필드 31’을 개점한 것에 있다. 하지만 한신 선수로서의 연봉으로는 스태프로서 고용한 전직 사원들 전체의 월급을 모두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택 근처의 통칭 ‘로맨틱 거리’에 개인 사무소 ‘가케후 기획’ 명의로 ‘핫 코너’라는 [[오코노미야키|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가게도 열었다.<ref name="sankei130611">[http://sankei.jp.msn.com/west/west_sports/news/130611/wsp13061107010000-n5.htm {{lang|ja|【田所龍一の球界よもやま話】「掛布監督」阻む“金銭トラブル”の実像はこうだ…誤解でイメージ悪化した「阪神の宝」がタテジマを着る日}}] {{웨이백|url=http://sankei.jp.msn.com/west/west_sports/news/130611/wsp13061107010000-n5.htm |date=20140114040929 }} - [[산케이 신문|산케이 뉴스 west]], 2013년 6월 11일</ref>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 가게가 개점한 이유는 프로 데뷔 후 첫 [[히로시마 시|히로시마]] 원정을 계기로 본고장인 히로시마풍 오코노미야키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f>[http://www.daily.co.jp/gossip/man_in_the_news/2013/09/23/2p_0006344676.shtml {{lang|ja|虎党お好み焼き店 元祖へんくつや}}] - 데일리 스포츠, 2013년 9월 23일</ref> 더욱이 한때는 [[게이한 전기 철도]]의 [[덴마바시 역]] 부근에서 ‘31 핫 코너’라는 토종닭 가게를 운영했던 것 외에도 ‘가케후 기획’과는 별도로 ‘가케후’라는 프로덕션 회사를 설립했다. ‘스포츠 하우스 필드 31’과 관련해서는 스태프 전원이 진로가 정해진 것을 계기로 폐점했다.<ref name="sankei130611"/>
* 해설할 때 선수 이름을 말할 때면 어미에 ‘~군’이라고 경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외국인 선수한테는 붙이지 않았다.<ref>관련 출처 :
* [http://www.daily.co.jp/tigers/2015/01/25/0007686558.shtml {{lang|ja|掛布DC 横田に「松井君より上」}}] - 데일리 스포츠, 2015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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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관계 ===
프로 2년째인 1975년 6월에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전에서 1점 뒤진 6회초 2사 만루 상황에서 3루 땅볼을 놓친 것을 시작으로 대량 실점을 내주어 경기에서 패했다. 경기 종료 후 락커룸에도 못 들어가고 문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선발 투수였던 [[에나쓰 유타카]]가 지나가다가 “뭐하는 거냐, 이 바보야. 마음에 두지 마라”라고 말해줬다고 한다.<ref>[https://web.archive.org/web/20101126050609/http://sankei.jp.msn.com/sports/baseball/071205/bbl0712050359000-n1.htm {{lang|ja|【わたしの失敗】プロ野球解説者・掛布雅之さん(2)}}] - MSN 산케이 뉴스, 2007년 12월 5일({{web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812044832/http://sankei.jp.msn.com/sports/baseball/071205/bbl0712050359000-n1.htm |date=2010년 8월 12일}})</ref>
 
[[나가시마 시게오]]를 경애했다고 하였는데 프로 데뷔한 시즌이던 1974년 5월 21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전에서 프로 데뷔 후 첫 안타를 기록했을 때 가케후는 3루를 노렸지만 나가시마한테 터치아웃 당했다. 하지만 ‘동경하던 나가시마’에게서 터치당한 것이 매우 기뻤다고 한다. 나가시마는 가케후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너한테 요미우리전에서 홈런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아서 분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너는 지바의 후배다. 분하긴 해도 진심으로 누구보다 큰 박수를 너의 홈런에 보낸다”라고 발언해 가케후도 “‘나가시마 교진’을 쓰러뜨리는 것이 나가시마가 가장 기뻐할 일”라고 생각했다고 한다.<ref>《요미우리-한신론》 p.148 ~ 149</ref>
 
신인 시절에 요미우리를 상대로 안타로 출루했을 때 [[오 사다하루]]가 “언제 그런 배팅을 배웠어?”라고 말을 걸어 왔는데 이것을 계기로 “아아, 날 보고 있었구나”라는 자신감이 붙었다고 한다. 사다하루와는 별로 말을 주고받지 않았고 사다하루가 말을 건넸던 것도 그 때뿐이었다. 그 반면에 나가시마 시게오는 3루에서 “너 몇 살이야?” 등 여러 가지를 묻곤 했다고 한다.<ref>《요미우리-한신론》 p.14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