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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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특별자치도|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ref name="대선장정">{{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219111658326 | 제목 = 盧당선자 대선장정 1년7개월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12-19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 경선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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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광역시|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ref name="media.daum.net">{{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0313080327044 | 제목 = 선호도 노무현 41.7 이회창 40.6%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03-13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광역시|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918505451&code=11121100 | 제목 = <nowiki>[민주 ‘光州 경선’ 의미]</nowiki> 노무현 대안론 ‘대세’잡나 | 출판사 = 국민일보 | 날짜 = 2002-03-16 | 저자 = 신종수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광역시|대전]]· [[충청도|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특별시|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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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선거와 민주당 후보 재신임 ===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 (정치인)|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0612093847373 | 제목 = 노무현 "후보 재신임 받을것"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06-12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시키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9724 | 제목 = "노무현 대선 후보 사퇴 반대" 73% | 출판사 = 오마이뉴스 | 날짜 = 2002-06-27 | 저자 = 이한기, 구영식, 이병한, 박수원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2&no=163107 | 제목 = 盧후보 사퇴론 또 불거지나 | 출판사 = 매일경제 | 날짜 = 2002-06-20 | 저자 = 김선걸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 정몽준 출마와 민주당 내분 사태 ===
[[2002년 FIFA 월드컵|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2/11/003000000200211121912637.html | 제목 = 후단협 속내는 '노후보 낙마' | 출판사 = 한겨레 | 날짜 = 2002-11-12 | 저자 = 박창식, 신승근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ref>{{뉴스 인용 | url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95052 | 제목 = 후단협의 목적은 '후보단일화'가 아니었다. | 출판사 = 오마이뉴스 | 날짜 = 2002-12-19 | 저자 = 박창식, 신승근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2&no=339167 | 제목 = 후단협 순수성 도마 위에 | 출판사 = 매일경제 | 날짜 = 2002-11-20 | 저자 = 남기현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014&aid=0000042287 | 제목 = 후단협 12명 민주 복당 | 출판사 = 파이낸셜 뉴스 | 날짜 = 2002-11-26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이런 상황에서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 (1964년)|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ref name="대선장정" />
 
===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219122117394 | 제목 = 후보단일화에서 파기까지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12-19 | 저자 =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ref>{{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105042551170 | 제목 = 후보단일화 방법론과 전망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11-05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122120826051 | 제목 = 盧 단일화 `승부수" 안팎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11-22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ref>{{저널 인용 | url =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6664.html | 형식 = | 제목 = 승부사 노무현 마침내 해냈다 | 저널 = 한겨레21 | volume = 436 | issue = | 날짜 = 2002-12-05 | 연도 = | 저자 = 김의겸, 이용호 | 쪽 = | 인용 = | pmid = | doi = | id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 꺾쇠표 =《 }}</ref>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실시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ref>{{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125012010632 | 제목 = 피말린 접전 盧승리 결말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11-25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이후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의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당선되어 새천년민주당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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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ref name="media.daum.net"/>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광역시|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918505451&code=11121100 | 제목 = <nowiki>[민주 ‘光州 경선’ 의미]</nowiki> 노무현 대안론 ‘대세’잡나 | 출판사 = 국민일보 | 날짜 = 2002-03-16 | 저자 = 신종수 | 쪽 = | 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4-22 }}</ref>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광역시|대전]]· [[충청도|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 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특별시|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