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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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원철 기자
|날짜=2013-02-24
|확인일자확인날짜=2013-02-24
|출판사=평화신문
}}</ref>
137번째 줄:
|저자=
|날짜=2001-08-19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3-05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150번째 줄:
|저자=설원태 기자
|날짜=2005-04-26
|확인일자확인날짜=2005-04-26
|출판사=경향신문
}}</ref>
179번째 줄:
|저자=박영호 기자
|날짜=2005-05-01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3-03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188번째 줄:
|저자=박영호 기자
|날짜=2005-05-01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평화신문
}}</ref>
198번째 줄:
|저자=연합뉴스
|날짜=2007-05-01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한겨레신문
}}</ref>
207번째 줄:
|저자=주영재 기자
|날짜=2013-02-12
|확인일자확인날짜=2013-02-12
|출판사=경향신문
}}</ref> 미국심장협회 회장 마리엘 제섭 박사는 USA투데이 인터뷰에서 “심장박동이 느려지는 등 교황의 심장 기능이 약화했을 수 있다. 그 나이대 사람에게 자주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214번째 줄:
|저자=노석조 기자
|날짜=2013-02-13
|확인일자확인날짜=2013-02-13
|출판사=조선일보
}}</ref>
223번째 줄:
|저자=
|날짜=2013-02-20
|확인일자확인날짜=2013-02-20
|출판사=YTN
}}</ref>
274번째 줄:
|저자=이창훈 기자
|날짜=2013-03-10
|확인일자확인날짜=2013-03-10
|출판사=평화신문
}}</ref>
314번째 줄:
|저자=
|날짜=2005-05-08
|확인일자확인날짜=2009-11-05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327번째 줄:
|저자=이창훈 기자
|날짜=2007-07-15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평화신문
}}</ref> 또한, 교황은 트리엔트 미사 방식을 허용하면서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원용했다. 첫째는 “교회의 기도 법칙은 교회의 믿음 법칙에 일치한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트리엔트 방식의 미사 전례 역시 가톨릭교회의 믿음 법칙에 따른 기도 법칙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기도 법칙의 ‘통상적 표현’, ‘특별한 표현’을 구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른 미사 방식을 ‘통상적 표현’, 트리엔트 미사 방식을 ‘특별한 표현’이라고 불렀다. 트리엔트 방식을 허용한다고 해서 로마 미사 예식이 두 가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 가지 예식을 두 가지 양식으로 사용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336번째 줄:
|저자=이창훈 기자
|날짜=2007-07-15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평화신문
}}</ref> 그리고 2011년 4월 30일 자의교서 《교황들》에 관한 훈령 《보편 교회》(Universae Ecclesiae) 제33항을 통해 성삼일 전례도 1962년판 로마 양식으로 거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350번째 줄:
|저자=
|날짜=2009-10-31
|확인일자확인날짜=2009-11-05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370번째 줄:
|저자=
|날짜=2010-08-01
|확인일자확인날짜=2010-08-01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380번째 줄:
|저자=
|날짜=2008-11-05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AM7
}}</ref>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대 과학에 대한 맹신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과학이 더한층 깊은 비전이라는 기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발견에만 집착하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추락과 같은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 교황은 “오늘날의 삶은 실험적 기술에 노예가 된 인위적 지능을 교만하게 만들고 있으며, 모든 과학은 인류를 지키고 인류가 진정한 선을 지향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점을 잊고 있다.”고 지적했다.<ref>{{뉴스 인용
387번째 줄:
|저자=
|날짜=2006-10-22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한겨레신문
}}</ref> 더불어 그는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몇몇 과학 연구 분야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서방의 과학 기술이 사람들이 더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신앙에 대한 냉소주의를 만연시키고 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394번째 줄:
|저자=
|날짜=2008-01-07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세계일보
}}</ref>
403번째 줄:
|저자=이예지
|날짜=2007-04-13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크리스천투데이
}}</ref>
412번째 줄:
|저자=정혜승
|날짜=2005-06-14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8-05
|출판사=문화일보
}}</ref>
426번째 줄:
|저자=조현정 기자
|날짜=2007-10-07
|확인일자확인날짜=2008-10-11
|출판사=매일경제
}}</ref>
435번째 줄:
|저자=박병희 기자
|날짜=2008-12-04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05
|출판사=아시아경제
}}</ref>
445번째 줄:
|저자=
|날짜=2010-12-31
|확인일자확인날짜=2010-12-31
|출판사=연합뉴스
}}</ref>
457번째 줄:
|저자=
|날짜=2007-09-16
|확인일자확인날짜=2008-10-11
|출판사=평화신문
}}</ref>
470번째 줄:
|저자=
|날짜=2012-12-12
|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12
|출판사=news1
}}</ref>
487번째 줄:
|저자=
|날짜=2011-10-01
|확인일자확인날짜=2011-10-01
|출판사=연합뉴스
}}</ref> 결국 베를루스코니는 2010년 예산안 지출 승인안 표결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후 2011년 11월 8일 총리직 사퇴 의사를 밝힌 후 12일 공식 사임하였다.
497번째 줄:
|저자=
|날짜=2009-06-22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6-22
|출판사=연합뉴스
}}</ref> 2011년 5월 8일에는 가톨릭 신자들은 다른 사람이나 외국인, 멀리서 온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에 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유럽으로 오는 이민자들과 난민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이들을 환대해줄 것을 재차 촉구했다.<ref>{{뉴스 인용
504번째 줄:
|저자=
|날짜=2011-05-09
|확인일자확인날짜=2011-05-09
|출판사=연합뉴스
}}</ref>
516번째 줄:
|저자=최종찬
|날짜=2007-10-13
|확인일자확인날짜=2007-10-13
|출판사=서울신문
}}</ref>
528번째 줄:
|저자=
|날짜=2011-05-19
|확인일자확인날짜=2011-05-19
|출판사=희망지성 국제방송
}}</ref>
548번째 줄:
|저자=이지희
|날짜=2006-09-17
|확인일자확인날짜=2008-12-05
|출판사=크로스맵
}}</ref> 그의 방문 소식에 터키 내 국가주의자들과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이 거세게 반대 집회를 열었으며, 교황의 경호 문제에 비상이 걸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교황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 사방이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교황 전용 의전차량 대신 강철로 된 특수 방탄차량을 동원하고 교황에게는 겉옷 안에 방탄조끼를 입도록 했다. 터키 정부도 교황이 방문하는 장소마다 테러범을 찾아 제거할 정예 저격수와 폭탄 처리 전문가, 대테러 요원들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 헬리콥터와 해군 쾌속정까지 동원하였다.<ref>{{뉴스 인용
555번째 줄:
|저자=최지영
|날짜=2006-11-28
|확인일자확인날짜=2008-12-05
|출판사=중앙일보
}}</ref> 2006년 11월 28일에서 12월 1일까지 3박4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진 터키 순방에서 교황은 터키 이슬람 최고 지도자 알리 바르다코글루와 만나고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 모스크]]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지 등을 방문하는 등 직접 이슬람과의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사태가 진정되었다. 더불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주례한 [[성찬|성찬예배]]에 참석하여 공동성명을 하는 등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사이의 거의 천 년이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 밖에도 터키의 소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종교적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ref>{{뉴스 인용
562번째 줄:
|저자=오혜민
|날짜=2006-12-08
|확인일자확인날짜=2008-12-05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575번째 줄:
|저자=박종률
|날짜=2008-04-22
|확인일자확인날짜=2008-12-05
|출판사=노컷뉴스
}}</ref> 교황은 이어 18일 [[뉴욕]]의 [[국제 연합]] 본부를 방문하여 행한 연설을 마치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584번째 줄:
|저자=
|날짜=2008-09-28
|확인일자확인날짜=2008-12-05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593번째 줄:
|저자=
|날짜=2009-03-24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3-24
|출판사=평화신문
}}</ref> 2011년 11월 18일에는 [[베냉]]을 방문하여 3일간의 머물렀다. 베냉 정부는 교황이 방문한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교황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620번째 줄:
|저자=
|날짜=2009-05-17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9-13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630번째 줄:
|저자=
|날짜=2009-10-05
|확인일자확인날짜=2009-11-05
|출판사=평화신문
}}</ref>
639번째 줄:
|저자=
|날짜=2009-04-20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5-08
|출판사=가톨릭신문
}}</ref>
=== 포르투갈 ===
2010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베네딕토 16세는 [[포르투갈]]을 방문하였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 93주년인 5월 13일, [[파티마 (포르투갈)|파티마]] 성모 순례지에 도착한 교황은 순례자 5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광장에서 기념미사를 거행하였으며, 파티마 성모 발현 목격자인 복자 프란치스코와 복녀 히아친타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파티마의 예언적 사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며 파티마의 메시지가 요구하는 회개는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88319&S=%ud3ec%ub974%ud22c%uac08|제목=교황, 포르투갈 사목방문|날짜=2010-05-30|출판사=가톨릭신문|확인일자확인날짜=2011-03-02}}</ref>
=== 영국 ===
2010년 9월 16-19일,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영국]]을 사목방문하였다.<ref>1982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영국을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공식 방문이 아니기 때문에 베네딕토 16세의 방문이 교황의 공식적 영국 방문의 처음이다.</ref>
649번째 줄:
교황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내외와 정치 지도자, [[영국 성공회]]의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등 종교 지도자, 가톨릭 사제단, 청년층과 노년층 등을 폭넓게 만나며 급격한 세속화가 진행 중인 영국 사회에 참된 신앙의 의미를 전하며,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세속화와 상대주의, 무신론에 도전받고 있지만, 신앙인들은 실천적 삶으로 하느님을 증거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가톨릭 신앙을 일깨웠다.
 
교황은 또 [[버밍엄]]의 코프턴 파크에서 19세기 신학자였던 가경자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시복식을 주례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351623&path=201009|제목="교황, 영국사회 영혼을 일깨웠다"|날짜=2010-10-03|출판사=평화신문|확인일자확인날짜=2010-10-03}}</ref>
 
그러나 한편으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스티븐 프라이]], [[리처드 도킨스]] 등 영국의 대표적인 반교회적·무신론적 성향의 지식인들이 대거 교황과 교회를 비난하고 반대 움직임을 벌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ref>
655번째 줄:
 
=== 스페인 ===
교황은 2010년 11월 6-7일, 이틀간 [[스페인]]을 사목 방문하였다. 6일에는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7일에는 스페인 국왕 부부가 참례한 가운데, 가우디가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해 아직도 건축이 진행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교황은 축복식에서 “[[안토니 가우디|가우디]]는 탁월한 건축가이자 그리스도인”이라며, 그의 필생의 작품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술과 예술, 신앙의 놀라운 종합”이라고 치하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의 해소될 수 없는 결합인 혼인과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고 증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95278&ACID=3|제목=교황, 스페인 사목 방문 … 바르셀로나 성 가정 성당 축복식 거행|날짜=2010-11-12|출판사=가톨릭신문|확인일자확인날짜=2010-11-12}}</ref>
 
또한 2011년 8월 제26회 [[세계 청년 대회]]가 [[마드리드]]에서 열리자 이를 위해 18일 마드리드 시벨레스 광장에서 참가자들을 만나 격려하고, 이어 20일에는 철야기도를 집전하고 전 세계 청년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21일에는 폐막 미사를 주례하였다.
663번째 줄:
 
=== 멕시코 ===
2012년 3월 23일~26일 나흘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멕시코]]를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멕시코 내 마약과 폭력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보호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과 가진 면담에서 멕시코 내 마약거래 조직간의 폭력과 멕시코의 세속주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내며 이같이 당부했다. 또한 과나후아토 평화광장에 모인 4천여 명의 어린이와 부모들에게 “멕시코 어린이들은 가톨릭의 미래를 책임질 일꾼들”이라며 격려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32515058220014&outlink=1|제목=교황 베네딕토 16세, "멕시코 내 아이들을 보호하라"|날짜=2012-03-25|출판사=머니투데이|확인일자확인날짜=2012-03-25}}</ref>
 
=== 쿠바 ===
2012년 3월 26일~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쿠바]]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방문 마지막 날인 28일 하바나 혁명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쿠바와 세계는 변화가 필요하지만 이것은 각자가 진실을 추구하고 화해와 우애가 싹트는 사랑을 선택할 때 가능하다”며 “진실은 인간이 항상 진정한 자유를 탐색하게 하는 욕망”이라고 말했다. 쿠바의 통상 금지 조치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경제 조치로 국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줬다.”고 지적했다. 교황의 이러한 발언은 아메리카 대륙에 하나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에서 정치적 개방을 요구하는 자들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미사 직후 [[피델 카스트로]]와의 비공개 만남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12032910168272634&outlink=1|제목=교황 베네딕토 16세, 50만 군중 앞에서 '쿠바 개혁 개방' 촉구|날짜=2012-03-29|출판사=머니투데이|확인일자확인날짜=2012-03-29}}</ref>
 
== 성추문 사건 은폐 의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