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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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국프로야구|2010년]] [[7월 26일]], 그는 현역에서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고,<ref>
{{뉴스 인용|제목 = 양준혁, 올 시즌 끝난 뒤 은퇴 선언|url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124756|출판사 = OSEN|저자 = 손찬익|날짜 = 2010-07-26|확인일자확인날짜 = 2010-07-26}}</ref> 2010년 [[9월 19일]] 홈구장인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은퇴식 및 은퇴 경기를 치렀으며, 이날 무안타를 기록했지만 마지막 [[송은범]]과 대결에서 내야 땅볼에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보여 양준혁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등번호 10번은 [[삼성 라이온즈]]에서 2번째 [[영구 결번]]이 되었으며, [[KBO 리그]] 9번째 영구 결번이 되었다.
 
당초 [[2011년]] [[2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을 계획이였으나 [[영남대학교|영남대학교 대학원]] 진학과 [[임용수]] 캐스터와의 친분으로 [[SBS]]와 계약하였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SBS]]와 [[SBS ESPN]]에서, [[2014년]]부터 [[MBC]]와 [[MBC Sports+]]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소속사는 [[JH 스포테인먼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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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동윤
|날짜=2007-06-09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2
}}</ref>
 
=== [[영남대학교]] 시절 ===
양준혁은 [[1988년]] 당시 만 19세로 프로 데뷔가 가능한 나이였으나 스스로 [[영남대학교]] 경제학과의 입학의 길을 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당시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그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서울특별시 소재 대학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삼성 라이온즈|삼성]]에서의 데뷔를 위해 [[영남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 선수 시절 동안 오늘날 프로에서의 활약만큼이나 많은 기록과 수상 경력을 쌓았다. [[1988년]]에 있었던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5할을 훨씬 넘은 5할 4푼 5리의 타율을 기록해 대학 선수권 타격상을 받았고,<ref name="아마">{{웹 인용 |url=http://www.samsunglions.com/M_Player/player_profile_batter.asp?pcode=93410&position=외야수 |제목=삼성 라이온즈 홈페이지 양준혁 |확인월일=2월 12일 |확인년도=2009년 }}</ref> 이후 [[1989년]]에는 대학 추계 리그에서 도루상 또한 수상했다.<ref name="ㄹ">{{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profile/profile_02.html |제목=아마경력/수상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2일 |확인년도=2009년 }}</ref>
 
1988년과 1989년, 아마추어 야구에서 실력을 인정받게 된 양준혁은 생애 처음으로 국가 대표로 발탁되어 제2회 [[한·미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게 된다.<ref name="ㄹ"/> 또한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최되는 제 9회 [[대륙간컵 (야구)|대륙간컵]]에도 국가대표로 출전했다.<ref name="ㄹ"/> 두 번의 국가대표팀 활동에서 그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팀은 우승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9년]] [[중화민국|대만]]에서 열린 제2회 [[IBA회장배 대회]]에 다시 국가 대표로 출전하여 우리나라가 우승하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래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ref name="ㄹ"/>[[1990년]]에는 전국대학 춘계리그에 출전하여 추계 리그에 이어 다시 한 번 도루상을 수상하였고,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 대회]]에도 국가 대표로 출전했다.<ref name="ㄹ"/>
 
[[1992년]] [[영남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각 팀들의 지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는 신인이었지만 이미 국가 대표 클린업 트리오 중 한 명이었을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모든 구단이 탐내는 선수였다. 물론 그는 삼성 이외의 팀에는 입단할 생각이 없던 터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타력에 비해 투수력이 약했던 삼성은 당시 '만딩고' [[김상엽 (야구인)|김상엽]] 외에는 믿을 만한 투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140&nbsp;km 대의 빠른 구속을 가진 좌완 신인 [[김태한]]도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연고 구단이 1차 지명할 수 있는 선수는 딱 한 명이라는 것이 문제였는데, 이에 삼성이 묘수를 냈다. 삼성은 1991년 말 열린 신인 드래프트에서 먼저 김태한을 연고 지명 케이스인 1차 지명으로 확보한 뒤 이듬해 드래프트에서는 양준혁을 1차 지명해 사자 유니폼을 입혔던 것이다. 이것은 2차 지명의 시효가 1년이라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든 것으로, [[1991년]] 당시 삼성은 일단 김태한을 1차 지명한 뒤 양준혁과는 모종의 합의 하에 상무 입대를 선언하게 한 것이었다.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이 양준혁을 2차 지명했으나 이미 그의 상무 입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삼성은 방위 복무로 전환하게 되어 1993년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 다시 나온 양준혁을 1차 지명하여 거둬들였다. 이 때문에 몇몇 구단들이 거세게 반발했고, 이후 KBO는 2차 지명의 효력을 1년에서 3년으로 연장했다.<ref name="ㄹ"/><ref name="김태한">{{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0&page=1&type=2&values=%B1%E8%C5%C2%C7%D1 |제목=야구는 인연을 낳고 - 양준혁과 김태한 |출판사=스포츠서울 |날짜=2000-02-10|확인일자확인날짜=2009-11-29}}</ref><ref name="ㄱㄱㄱㄱㄱㄱㄱ">{{뉴스 인용
|제목=김인식 감독 가슴에 박힌 ‘16년 미운 털’ 양준혁..
|url=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75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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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회훈
|날짜=2007-06-10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3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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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회훈
|날짜=2007-08-28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1-24
}}</ref> 당시 여러 전문가들은 양준혁, [[김성래]], [[강기웅]], [[이종두]]가 있는 삼성의 중심 타선을 문제로 지적하고, 약체로 취급하게 하였으나<ref name="경향신문"/> 신인 양준혁의 대활약과 부상에서 돌아온 4번 타자 김성래 및 이종두의 활약으로 팀은 준우승까지 하였다.<ref name="obbe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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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SPORTS 2.0 2007년 10월호
|저자=최민규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1-24
}}</ref> 그래도, 한 팀에서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배출시킨 경우는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김성한 (1958년)|김성한]](MVP)과 [[이순철]](신인왕)에 이어 2번째였다. 양준혁은 [[삼성 라이온즈]] 최초의 신인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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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신보순
|날짜=2008-11-04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1-28
}}</ref> 팀 성적이 나쁜 양준혁은 삼성이 만약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늘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1996년]] 삼성은 6위라는 성적을 기록했으며, 첫 30-30을 기록한 신인 박재홍, [[KBO 다승왕|다승왕]]과 최고의 마무리였던 [[구대성]]이 유리하게 되어서 MVP 투표에서 양준혁은 최고 [[수위 타자]]와 최다 안타, 장타율 1위를 기록하고도 다시 도전한 MVP에서 탈락하고 프로에 데뷔한 후 처음으로 받는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에 만족해야만 했다.
 
=== 해태로 트레이드되다 ===
[[1999년]] 양준혁은 삼성에서 [[해태 타이거즈|해태]]로 전격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는 선수협이 만들어지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당시 유망주였던 [[곽채진]], [[황두성]]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투수]] [[임창용]]을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판단은 양준혁과의 연봉 협상을 피하기 위해<ref name="궹">{{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510&page=76&type=&values= |제목=양준혁·임창용 `슈퍼 빅 딜` |확인월일=1월 29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1998년 |작성월=12월 14일 |출판사=경향신문 |쪽= }}</ref> 빅 트레이드를 성사시킴으로써 외국인 선수로 그 공백을 메우려는 것이었다.<ref name="트레이드의 악몽">{{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511&page=76&type=&values= |제목=임창용-양준혁 트레이드 "이보다 더 클순 없다"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29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1998년 |작성월=12월 14일 |출판사=조선일보 |쪽= }}</ref> 양준혁은 이 트레이드 이후 열흘 이상 잠적하였다. 다시 기자 회견을 열어 트레이드를 전면 거부한다는 의견을 밝히고 [[미국]]의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 의견대로 [[미국]]으로 진출한다면 양준혁은 해태가 임의탈퇴 처리를 하면 한·미 선수협정 7항에 따라 [[미국]]에 진출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양준혁은 마이너 리그 진출이 아닌 1년간 [[미국]] 연수를 한다고 말을 하며,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혔다.<ref name="양1">{{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93&page=75&type=&values= |제목=양준혁 "트레이드 거부" 미국서 야구연수 1년 결정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29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 1998년 |작성월= 12월 23일|출판사=스포츠조선 }}</ref><ref name="양2">{{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92&page=75&type=&values= |제목=양준혁 파동 새 국면 "마이너 리그서 뛰겠다"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29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1998년 |작성월= 12월 23일|출판사=일간스포츠 }}</ref><ref name="양3">{{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91&page=75&type=&values= |제목= 양준혁 미국진출 완벽한 해태선수, 현 제도상 불가능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29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1998년 |작성월=12월 23일 |출판사=일간스포츠 |쪽= }}</ref>
 
해태에서 양준혁 문제가 골칫거리가 되자 갑작스럽게 양준혁이 [[현대 유니콘스|현대]]로 재트레이드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삼성은 양준혁을 "재트레이드를 하지 말라"라고 요청하자 해태는 재트레이드가 없음을 말했다.<ref name="양4">{{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81&page=75&type=&values= |제목= 삼성 "양준혁 현대행 노" 해태에 요청할듯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29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1998년 |작성월=12월 24일 |출판사=스포츠조선 |쪽= }}</ref> 양준혁이 계속해서 해태에 돌아오지 않자, 해태는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라는 의견을 밝혔고,<ref name="양5">{{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78&page=74&type=&values= |제목= 양준혁 해태 법대로 하겠다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 1998년 |작성월= 12월 27일|출판사=스포츠조선}}</ref> 양준혁이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인 미국행을 굽히지 못한다면 임의탈퇴 공시 신청을 할 예정이었다.<ref name="양5"/>
 
이렇게 끝날 줄 몰랐던 양준혁의 트레이드 파동은 그가 계속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미국행 연수를 하려 한 양준혁이 극적으로 해태에 가게 된 이유는 프로 야구에서 국내에서 팀을 옮기려면 10년을, 해외로 진출하려면 7년을 뛰어야 갈 수 있게 만든 [[자유 계약 선수]] 제도의 도입과 함께 당시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용]]의 말에 의해 양준혁은 [[김응용]] 감독에게 사과하고, 양준혁은 전화 통화 뒤 4일 만에 해태에 이적하겠다고 밝혀 트레이드 파동이 일단락되었다.<ref name="가나다라"/><ref name="양7">{{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73&page=74&type=&values= |제목= 양준혁 김응룡 감독에 전격 사과 심경 변화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 1998년 |작성월= 12월 30일|출판사=스포츠조선}}</ref><ref name="양8">{{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72&page=74&type=&values= |제목= FA제도 도입만으로도 큰 발전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 1998년 |작성월=12월 30일|출판사=스포츠조선 }}</ref><ref name="양9">{{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70&page=74&type=&values= |제목= 양준혁 해태 합류 내년 日진출 모색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 1998년 |작성월= 12월 30일|출판사=스포츠조선}}</ref>
 
트레이드 파동이 일단락된 후 양준혁은 [[1999년]] [[1월 8일]], 해태에 첫 방문을 한 뒤, 팀 훈련에 합류하면서 [[김응용]] 감독을 만나 해태 V10 결의를 했고, 해태의 선수들과 우승을 위해 전지 훈련을 떠난 뒤 양준혁은 개인적으로 특별 타격 훈련을 자청하였다.<ref name="weqweqweq">{{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71&page=74&type=&values= |제목=양준혁, 인사차 해태구단 방문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26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 1999년 |작성월=1월 8일|출판사=동아일보 }}</ref><ref name="ewqewqewq">{{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467&page=74&type=&values=|제목= 양준혁-김응룡 해태 V10 결의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26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1999년 |작성월= 1월 12일|출판사=스포츠서울}}</ref>
 
라이벌 팀으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대구 팬들은 경기에 나선 양준혁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70089 양준혁, 결코 평범하지 않은 2000안타] - 데일리안</ref>, 이후 그가 FA를 선언하였을 때 [[김응용]] 감독이 양준혁의 [[삼성 라이온즈]] 복귀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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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협 결성 ===
{{본문|2000년 선수협 파동 사건}}
[[KIA 타이거즈|해태]]로 트레이드 된 이후 1년 뒤, 양준혁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를 결성하게 되었다. 그는 선수협의 설립 목적이 "국내 프로 야구 선수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대외 홍보를 강화하며 야구의 건전한 보급과 지원을 통해 장기적으로 한국 프로 야구를 국제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다"라고 밝히며 선수협은 노동 조합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ref name="양10">{{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300&page=66&type=&values= |제목= 양준혁 "옷 벗을 각오로 선수협 결성을 성사시키겠다"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1월 18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 |쪽= }}</ref> 그는 옷을 벗을 각오까지 하고 선수협 결성에 나섰다고 밝히면서 선수들의 권익과 복지차원에서 선수협 결성을 추진한다고 말했다.<ref name="양11">{{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99&page=65&type=&values= |제목= 양준혁 일문일답|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1월 18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 }}</ref> 주변의 우려와 소속구단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수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해태는 양준혁이 단체행동 사전 고지 임무를 어겼기 때문에 임의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강경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은퇴까지 불사하고 선수협을 결성을 달성하려는 양준혁과 임의탈퇴라는 최후의 카드까지 꺼내든 소속 구단은 정면 대립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ref name="양12">{{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97&page=65&type=&values= |제목= 해태 "양준혁 임의탈퇴도 불사"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1월 19일 |출판사=스포츠조선 }}</ref><ref name="양13">{{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95&page=65&type=&values= |제목=해태-양준혁 `임의탈퇴`-`야구포기` 정면충돌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1월 19일 |출판사=일간스포츠 }}</ref>
 
다른 선수들과 합심하여 투쟁을 계속한 끝에 결국 [[2000년]] [[1월 22일]]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가 공식 출범하게 되었으며, 초대 회장은 [[송진우 (야구인)|송진우]], 감사는 [[정수근]], [[박충식 (1970년)|박충식]]이 맡게 되었다.<ref name="양14">{{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93&page=65&type=&values= |제목= 선수회 출범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1월 22일|웹사이트= |출판사=스포츠서울 }}</ref> 선수협 출범 후 하루 뒤 [[한국 야구 위원회|KBO]]는 양준혁의 영구 제명을 추진하였는데, 이러한 KBO의 움직임에 이번에는 시민 단체가 선수협을 지지하며 KBO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양준혁을 비롯한 여러 선수협 선수들은 선수협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전지 훈련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선수협 문제는 [[2000년 한국프로야구|2000 시즌]] 시범 경기 개막을 하루 앞둔 2000년 3월 10일 열린 선수협과 KBO의 협상에서, '선수협은 올시즌 종료후 결성하고 제도개선위원회는 4월 3일 발족시킨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합의사항이 도출되면서 극적으로 타결되었다.<ref name="양15">{{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89&page=65&type=&values= |제목=선수협 시민단체 동참 "실체인정" 압박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1월 26일|출판사=스포츠조선 }}</ref><ref name="양16">{{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82&page=65&type=&values= |제목=선수협 승리 그날까지 |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2월 8일 |출판사=스포츠서울 }}</ref><ref name="양17">{{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0&page=1&type=2&values=%B4%EB%C5%B8%C7%F9 |제목=선수협 대타협|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1월 31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11일 |출판사=스포츠서울 }}</ref>
 
그러나 2002년 삼성으로 복귀후 선수협이 2009년 선수노조로 전환을 시도하자 삼성 선수가 퇴장했는데 강병규의 인터뷰에 양준혁의 책임을 말하곤 있지만,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양준혁이 인솔해서 나갔다는 믿음과는 다르게 그런 증언은 발견할수가없다.
 
=== [[LG 트윈스|LG]]로 트레이드되다 ===
양준혁은 선수협 파동 이후 얼마 가지 않아 [[LG 트윈스|LG]]로 선수협 여파로 인해 다시 한 번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소속 팀이었던 [[KIA 타이거즈|해태]]의 감독 [[김응용]]이 양준혁을 "선수 + 현금" 방식으로 트레이드 하겠다는 뜻을 말하자, 직접 [[LG 트윈스|LG]] [[권혁철]] 사장이 "적당한 선이라면 얼마든지 트레이드할 의사가 있다" 라고 영입 의사를 밝혔고, 또 당시 신생 팀이었던 [[SK 와이번스|SK]]가 양준혁을 사겠다고 선언했다.<ref name="가나다라양준혁2">{{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63&page=64&type=&values= |제목=LG, `양준혁 사겠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25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23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ref name="양18">{{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63&page=64&type=&values= |제목=김응룡 감독 "양준혁 팔겠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2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23일 |출판사=일간스포츠}}</ref><ref name="양19">{{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60&page=64&type=&values= |제목=LG, `양준혁 사겠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2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23일 |출판사=스포츠 투데이}}</ref> [[현대 유니콘스|현대]]도 여러 문제로 인해 양준혁을 사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선수협이 걸림돌로 작용하여 양준혁 영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해태 타이거즈|해태]]가 '10승 투수를 내주어야 트레이드하겠다' 는 말에 [[SK 와이번스|SK]]와 [[LG 트윈스|LG]]는 서로 난색을 표했고, 결국엔 [[LG 트윈스|LG]]가 전년도에 10승을 거두었던 [[투수]] [[손혁]]에 현금 5억 원을 얹어 현금 트레이드하여 양준혁을 영입하게 되었다. 당시 [[LG 트윈스|LG]]와 함께 양준혁 영입 쟁탈전을 벌이던 [[SK 와이번스|SK]]는 [[LG 트윈스|LG]]와 달리 [[KIA 타이거즈|해태]]와의 트레이드 협상이 [[LG 트윈스|LG]]처럼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해태 타이거즈|해태]]의 트레이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뒤처지게 되었다.<ref name="양20">{{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58&page=63&type=&values= |제목=양준혁 쟁탈전 불붙었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3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23일 |출판사=스포츠 조선}}</ref><ref name="양21">{{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55&page=63&type=&values= |제목=`양준혁 트레이드` 다른팀 반응|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23일 |출판사=스포츠 서울}}</ref><ref name="양22">{{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50&page=63&type=&values= |제목=줌업 양준혁-손혁 빅딜의 배경|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24일 |출판사=일간 스포츠}}</ref> 그는 이전에 있었던, 삼성이 해태로 자신을 트레이드한 사건과 달리 [[LG 트윈스|LG]]로 가는 이 트레이드에 불만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ref name="양23">{{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47&page=63&type=&values= |제목="이번 트레이드 절대 불만 없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3월 24일 |출판사=스포츠 조선}}</ref>
 
반면 양준혁의 현금 트레이드 상대였던 [[손혁]]은 이적을 거부하고 은퇴 의사를 굽히지 않게 되었고, [[KIA 타이거즈|해태]] 구단은 손혁을 [[2000년]] [[4월 16일]]에 임의탈퇴 신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KBO (야구)|KBO]] 이상국 사무총장이 "[[손혁]]이 [[일본]]에서 돌아오면 직접 만나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이며 [[해태 타이거즈|해태]] 구단은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하지 않았다. 후에 [[손혁]]은 팀에 돌아오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해 보지 못하고 [[2002년]] 시즌 후 [[진필중]]을 상대로 김창희와 함께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된 후 [[2004년]]에 은퇴했다.<ref>{{웹 인용| |url=http://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27&page=62&type=&values= |제목=(현장메모) 양준혁 "어느 팀이야?"|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9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4월 24일 |출판사=일간스포츠}}</ref>
 
[[LG 트윈스|LG]]로 트레이드된 후 양준혁의 등번호를 정하기 위해 [[LG 트윈스|LG]] 구단은 많은 고민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준혁이 줄곧 달았던 10번을 내야수 [[안상준]]이 이미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상준]]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묘안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1번과 38번 중 하나를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LG 트윈스|LG]] [[이광은]] 감독은 "38광땡"이라 행운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38번을 추천했다고 한다.<ref>{{웹 인용| |url=http://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32&page=62&type=&values= |제목=양준혁 등번호 어떻게 될까|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9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4월 12일 |출판사=스포츠서울}}</ref> 그러나 양준혁은 "선수의 권익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서 후배([[안상준]])의 등번호를 뺏기는 싫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생소했던 57번을 등번호로 달았다.<ref>{{웹 인용| |url=http://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31&page=62&type=&values= |제목=양준혁 등번호 어떻게 될까|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9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4월 24일 |출판사=스포츠서울}}</ref> 하지만 2001 시즌이 되면서 다시 원래의 등번호인 10번을 사용하게 되었다.
 
[[LG 트윈스|LG]] 이적 첫해에는 한때 타율이 0.235까지 떨어지는 부진을 보이며 [[LG 트윈스|LG]] [[이광은]] 감독의 애를 태우기도 했지만<ref>{{웹 인용| |url=http://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220&page=62&type=&values= |제목=LG 양준혁 2할3푼... 의기소침|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9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0년 |작성월=5월 11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 이후 타격 페이스가 살아나기 시작하며 3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여 시즌을 마칠 수 있었고, 이듬해에도 본인의 최고 타율인 0.355 로 타격왕에 등극하며 [[자유계약선수제도|FA]] 자격이 될 수 있는 시즌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면서 후일 [[LG 트윈스|LG]]와 한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 삼성으로 귀환 ===
양준혁은 FA 자격이 10년에서 9년으로 줄어들면서 [[2001년]] 말 FA 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고, LG 팀 훈련 도중 FA를 선언하기 위해 따로 귀국하였다.<ref name="양24">{{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72&page=54&type=&values= |제목=1년 단축…FA 시장 더 뜨거워진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1일 |출판사=goodday }}</ref><ref name="양25">{{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61&page=54&type=&values= |제목=양준혁 FA 선언… 훈련 도중 귀국|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3일 |출판사=스포츠서울 }}</ref> 양준혁은 FA를 신청하기 위해 FA 신청서를 구단에 공식적으로 제출하였고, 제일 먼저 자신의 소속팀 LG와 협상을 하게 되었다.<ref name="양26">{{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54&page=53&type=&values= |제목=양준혁, FA 신청서 구단에 공식 제출|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6일 |출판사=스포츠서울}}</ref> 양준혁은 LG에게 4년 연봉 16억 + 계약금 20억 원을 요구했고, LG [[최종준]] 단장은 양준혁과의 3차 협상에서 협상 불가능이라고 뜻을 밝히며, 공식적으로 협상을 포기하였다.<ref name="양27">{{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30&page=52&type=&values= |제목=LG "협상 불가능" 초강수|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20일 |출판사=일간스포츠 }}</ref><ref name="양28">{{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29&page=52&type=&values= |제목=36억 NO! LG-양준혁 협상 결렬|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20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 }}</ref><ref name="양29">{{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18&page=51&type=&values= |제목=LG "양준혁 나가라" 36억원 말도안돼|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21일 |출판사=goodday }}</ref> 양준혁은 LG와 협상이 결렬된 뒤 36억 원을 포기하며 다른 구단과 FA 협상할 준비를 하였으나 그의 여전히 높은 몸값으로 인해 선뜻 그를 원하는 구단은 나타나지 않았다.<ref name="faplayer">연합 뉴스 - 2010년 9월 기사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664784 "양준혁 “2002년 미국 야구 도전했을 것”"]</ref> FA 선수 중 유일하게 계약을 하지 못한 선수로 남은 양준혁은 한동안 방황하는 듯했으나 다행히 당시 삼성 감독으로 있던 [[김응용]]의 부름을 받으며 좋은 조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KIA 타이거즈|기아]]가 거포 [[김기태 (1969년)|김기태]]를 놓치자 뒤늦게 양준혁을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양준혁의 몸값에 대한 부담과 팀 컬러에 맞지 않는다는 코칭 스태프의 의견으로 양준혁 영입은 확실히 넘어가게 되었다.<ref name="양30">{{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06&page=51&type=&values= |제목=양준혁 "36억 포기… 자존심만 세워달라"|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5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25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ref name="양31">{{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1001&page=51&type=&values=|제목=양준혁 "내 새 둥지는 어디…"|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5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28일 |출판사=스포츠조선 }}</ref><ref name="양32">{{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82&page=50&type=&values=|제목=기아 '양준혁 포기' 최종 결정|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5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2월 4일 |출판사=goodday }}</ref><ref name="이탈기사">{{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76&page=49&type=&values=|제목=기아 "양준혁 영입 포기"|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5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2월 9일 |출판사=일간스포츠 }}</ref> 삼성 구단측은 애초에 양준혁이 FA로 나올 때부터 '양준혁 영입은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했었다. 그 이유는 양준혁의 몸값과 삼성의 톱타자인 [[마해영]], [[이승엽]]과의 포지션 중복, 잇따른 FA 영입 실패로 인해 압박이 컸다. 그러나 삼성은 감독이었던 김응용 감독의 요구와 양준혁의 입지가 크게 좁아지자 삼성은 양준혁 영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ref name="양33">{{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95&page=50&type=&values=|제목=미아 위기 양준혁 삼성서 러브콜|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5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28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 삼성은 양준혁 영입에 관한 긴급 회의를 열게 되었고, 모든 포지션을 수비해 본 양준혁을 [[외야수]]에 두면 포지션 중복이 없다는 의견이 나왔고, 김기태 수준으로 양준혁의 영입을 검토해 보겠다는 결과가 나왔다.<ref name="양34">{{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89&page=50&type=&values=|제목=삼성 '양준혁 영입' 긴급회의…김기태 수준 검토|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3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1월 30일 |출판사=goodday}}</ref> 이후 양준혁은 삼성과의 첫 협상 전, 27억 원이라는 입단 조건에 합의한 것으로 밝혀졌고, 첫 협상은 27억 원에 옵션 부문만 추후 협의하기 위해 협상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ref name="양35">{{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68&page=49&type=&values=|제목=양준혁 '삼성행 굳혔다' 27억원 입단조건 합의|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3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2월 14일 |출판사=goodday }}</ref> 첫 협상은 계약기간과 계약금은 서로 비슷했지만, 연봉·옵션 부분에서 삼성은 마이너스 옵션을, 양준혁은 플러스 옵션을 제시하여 서로 의견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현재 밝힌 부분이 최종은 아니다' 라고 말해 사실상 합의를 이뤘음을 암시했다.<ref name="양36">{{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61&page=49&type=&values=|제목=양준혁 첫 공식협상…삼성 컴백 급물살|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2월 17일 |출판사=스포츠서울}}</ref> 이후 2차 협상에서 삼성과 양준혁은 2차 협상 전, 사전 조율을 통해 의견을 좁혔고 최종적으로는 23억 2,000만 원에서 마이너스 옵션 6억원, 플러스 옵션 4억 원으로 삼성에 입단하게 되었다. 양준혁은 이 협상에 협의한 이유가 옵션을 모두 플러스 옵션으로 끝낸다면 27억 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삼성이 자신이 원하는 금액을 제시해 구단이 자신의 자존심을 세워 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약에 협상했다고 밝혔다.<ref name="양37">{{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44&page=48&type=&values=|제목=양준혁 27억 삼성행, FA 사상 최고액 사인|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2월 21일 |출판사=스포츠 조선}}</ref>
 
삼성에 입단한 양준혁은 이후 신문 기사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에 입단할 수도 있었다고 보도했다.<ref>스포츠 서울 - 2010년 7월 기사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8040.htm "양준혁, 파란만장했던 18년간의 프로 생활"]</ref><ref>스포츠 조선 - 2010년 9월 기사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ut=1&name=/news/sports/201009/20100915/a9o74111.htm "양준혁, 뉴욕 메츠 제안서 9년 만에 공개"]</ref><ref>스포츠 조선 - 2010년 9월 기사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ut=1&name=/news/sports/201009/20100915/a9o74112.htm "양준혁, 뉴욕 메츠를 알아봤던 사연은"]</ref><ref>스포츠 조선 - 2010년 9월 기사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ut=1&name=/news/sports/201009/20100916/a9p74136.htm "양준혁 뉴욕 메츠 제안서와 국내 프로 야구 제안서의 비교"]</ref> 이미 뉴욕 메츠에서는 [[바비 밸런타인]] 감독의 사인까지 난 상태에서 한국 프로 야구의 FA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뉴욕 메츠의 [[오마르 미나야]] 국제 스카우트 부사장은 양준혁과 직접 접촉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LG와 협상이 결렬된 뒤, 양준혁이 '국내 구단 중 아무런 곳도 불러주지 않는다면 해외로 진출 하겠다'라고 말한 것도 뉴욕 메츠를 염두에 뒀기 때문에 이 같은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밝혀졌다. 뉴욕 메츠는 여러 구단들이 선수협에 깊은 관련이 있는 양준혁을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아무 구단도 영입하려 하지 않자 상황을 지켜 본 뒤 양준혁에 대한 영입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삼성의 김응용 감독이 영입 의사를 보이면서 4년의 계약에 성공했으며, 그에 따라 뉴욕 메츠의 양준혁 영입은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도 양준혁은 김응용 사장을 은인이라고 존경할 정도로 김응용 당시 감독으로부터 선수 생활 구제를 받았다<ref>스포츠 조선 - 2010년 9월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9/2010091900074.html "김응룡 사장이 말하는 양준혁... 술-담배 모르는 모범적인 선수"]</ref>) 당시 뉴욕 메츠가 양준혁에게 제시하려고 했던 금액은 계약 기간 2년에 약간의 계약금과 연봉 120만 달러(당시 15억 6천만원)라는 수준으로 조건을 제시하려고 했다. 뉴욕 메츠는 양준혁을 1루수, 혹은 외야수로 쓰려고 했는데 기존 1루수인 [[토드 질]]을 트레이드 하면, 양준혁이 빈 자리를 메꾸어 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양준혁을 영입하려고 했다. 또한 뉴욕 메츠는 양준혁을 [[스즈키 이치로|이치로]]와 비교해서 수비는 떨어지지만 타격은 비슷한 수준이라는 평가까지 내린 상태였다. 만약 국내 구단들이 양준혁을 계속 외면했다면, 양준혁은 메이저 리그로 떠나 있었을 것이다.<ref name="양38">{{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925&page=47&type=&values=|제목=양준혁 뉴욕 메츠 갈 뻔했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4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1년 |작성월=12월 27일 |출판사=스포츠조선}}</ref>
하지만 양준혁이 기자에게 공개했던 뉴욕 메츠 입단제안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2001년 당시 외국구단에서 [[KBO]]에 양준혁에 대한 신분조회 요청이 없었고, 양준혁 본인이 공개했던 뉴욕 메츠 입단제안서 외에는 다른 공식적인 확인이나 다른 야구인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 제안서에 사용되었던 용어에도 한국식영어가 그대로 사용되었고,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한국 프로야구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 첫 우승 ===
[[2002년 한국프로야구|2002 시즌]] 친정팀 삼성에 돌아온 후 10년 연속 3할에 도전했으나, 갑작스런 부진에 빠졌다. 결국 2할 7푼대의 타율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훈련 도중 FA를 위해 귀국해서, 훈련 부족이 문제가 되어 2002년에 3할의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진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양준혁은 시즌 전 삼성의 훈련 끝에 자체 청백전과 시범 경기에서 대활약을 보여주면서 한때 [[한국 야구 위원회]]에서 설문 조사를 했을 때 가장 가능성 있었던 기록이 양준혁의 10년 연속 3할이라고 나왔었다.<ref name="첫우승1">{{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85&page=45&type=&values=|제목=KBO, 설문 1위 - 양준혁 3할 달성|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2월 20일 |출판사=중앙일보 }}</ref> 또한 한국 프로 야구가 열리기 전 시범 경기에서 대활약으로 인해 여러 기사에서 극찬을 받았고, 기사에서 [[이종범]], [[이병규 (1974년)|이병규]]와 함께 타격 부문 후보로 뽑히기도 했다.<ref name="첫우승2">{{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43&page=43&type=&values=|제목=프로 야구 개막 ― 타격 부문 후보|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4월 3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 양준혁은 한국 프로 야구가 개막된 뒤 새로 만든 '탈수기 타법'으로 4할 1푼 7리라는 타율을 기록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2할 7푼 8리로 추락하였고, 심지어 그의 타율은 개막전이 열린 후 5월 초부터 더욱 급격히 하향곡선을 보였고, 2할 5푼대를 기록한 후 계속해서 타율은 상승하지 못하였다.<ref name="첫우승3">{{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08&page=41&type=&values=|제목=양준혁 ‘10연속 3할’ 주저앉나|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6월 11일 |출판사=스포츠 투데이}}</ref>
 
양준혁은 6월에 5월부터 계속 지속되었던 타격 부진이 잘 맞은 타구가 계속해서 야수 정면으로 가고, 타격 부진이 지속되자 "작년에는 잘맞은 타구가 거의 안타가 되었는데 올해는 이상하다. 자꾸 정면으로만 간다"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그는 타격 부진이 일시적인 불운으로 생각되었으나 계속해서 타격 부진이 이어지게 되면서 타격 자세에 대한 의문이 들어 계속해서 타격폼을 바꾸었지만 역시 타격 부진은 지속되어 나아지지가 않았고, 타격감이 좋을 때는 타격 훈련을 통해 스윙을 점검하지만 타격감이 좋지 않을 때는 각종 자세를 시험해 보는 문제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타격 부진에 이어 심지어 양준혁에게 타격 부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스트레스 피로감으로 인해서 더욱더 타격 부진에 빠져 벗어나오기 힘들어지게 되었다.<ref name="가나다라양준혁">{{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808&page=41&type=&values=|제목=삼성 양준혁은 6월 '위기의 남자'|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25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6월 5일 |출판사=스포츠서울}}</ref>
 
그러나 전반기가 끝날 즈음에 양준혁은 다시 타격감이 좋아지게 되었으나 다시 후반기가 열린 뒤, 다시 타율이 2할 5푼 6리를 기록하는 등 타격감이 나빠지게 되었고, 결국엔 10년 연속 3할 타율을 포기하고 팀의 정규 시즌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ref name="첫우승4">{{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784&page=40&type=&values=|제목=체크체크 양준혁, '10년 3할' 포기|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8월 2일 |출판사=스포츠조선 }}</ref> 10년 연속 3할에는 실패했으나 세 자릿수 안타는 간신히 성공하게 되었고 팀은 후반기에 연승 행진과 여러 선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2002년에도 정규 시즌 우승을 하여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양준혁은 한국시리즈에서 2002년에 부진했던 것을 다시 좋은 활약을 보여 명예 회복을 다짐했고, [[경산 볼파크]]에서 자청한 특별 타격 훈련을 받았다.<ref name="첫우승5">{{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761&page=39&type=&values=|제목=양준혁, KS서 명예 회복 다짐|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10월 27일 |출판사=스포츠조선}}</ref>
 
한국시리즈가 시작된 후 1차전에서 그는 우익선상 2루타를 치고, 다음 후속 타자 [[진갑용]]의 우익수 플라이 후 전력 질주하여 3루까지 태그업, 과감한 허슬 플레이로 기사가 나왔고, 2차전에서는 선발 엔트리에서 제외가 되었지만 이후 3차전에서 팀이 승리를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ref name="첫우승6">{{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749&page=38&type=&values=|제목=양준혁 "우승 위해서라면?"|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11월 4일 |출판사=스포츠조선}}</ref><ref name="첫우승7">{{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744&page=38&type=&values=|제목="역시! 양준혁" 감독 기대에 부응|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11월 6일 |출판사=일간스포츠}}</ref> 4차전까지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4할 2푼 9리로 우승과 명예 회복을 앞두고 앞두고 있었으나, 팀의 4·5차전 연패로 인해서 우승을 미뤘지만 결국 6차전에서 역전, 우승하여 그는 야구를 시작한 뒤 아마추어 시절에도 하지 못했던 우승을 프로에서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다.<ref name="obbest" />
 
우승 후 양준혁은 삼성 라이온즈와 마이너스 옵션과 플러스 옵션 식으로 계약했었으나, 2002년에 경기 출전, 타율면에서는 마이너스 옵션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지만 타점에서 10타점이 부족하여 팀에게 1억을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가 2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제패하면서 30억 원을 얻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양준혁의 반납 금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준혁은 "옵션 문제에 대한 씁쓸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지금은 우승의 뒷맛을 즐기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ref name="첫우승8">{{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736&page=37&type=&values=|제목=양준혁 1억 반납 "아! 10타점"|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11월 20일 |출판사=goodday }}</ref> 그러나 양준혁의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의 배려로 양준혁은 마이너스 옵션인 1억 원을 반납하지 않게 되었고, 삼성 라이온즈는 옵션 해제 이유를 최선참으로 선수단 내 끈끈한 팀워크를 형성하며 정규 리그 1위와 한국시리즈 첫 우승에 공헌했기 때문에 1억 원을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 당시 대구에 있었던 양준혁은 팀이 자신의 마이너스 옵션을 해제 해준 것에 대해 "구단의 배려에 감사하다. 올해 하지 못한 것까지 내년에 하라는 것으로 보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f name="첫우승9">{{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735&page=37&type=&values=|제목=삼성 양준혁, 1억 반납 모면|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11월 21일 |출판사=스포츠 서울 }}</ref><ref name="첫우승10">{{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734&page=37&type=&values=|제목=삼성, 양준혁 마이너스 옵션 1억 안 받기로|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7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2년 |작성월=11월 21일 |출판사=스포츠서울}}</ref>
 
=== 두 번째 부진 ===
[[2005년 한국프로야구|2005 시즌]], 그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02년과 달리 훈련도 부족하지 않았고, 그리고 타격폼을 바꾼 2002년과 달리 양준혁은 [[심정수]]와 함께 팀 자체 청백전에서 대활약을 보였고, 자신 스스로 추가 훈련을 하면서 공격 훈련와 함께 스스로 수비 훈련을 하여 [[2004년]] [[1루수]] 수비 이후 불안정한 수비를 해결하고 [[선동열]] 감독이 자신을 [[지명타자]]로 돌리는 것을 존중하나 타격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비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수비 훈련을 열심히 하여 내야 수비가 안되면 외야 수비도 하겠다고 말했다.<ref name="두부1">{{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40&page=23&type=&values=|제목=양준혁 "반쪽 선수는 싫어" …수비 훈련 구슬땀|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3월 7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
 
그러나 [[김한수 (야구인)|김한수]]에게 1루수를 넘겨 주고 훈련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범 경기에서도 지명 타자로 출전해 타격감도 좋지 않았다. 시즌이 열린 뒤 개막 3게임에서도 홈런 1개 없이 10타수 1안타로 타율은 1할을 기록하였다. 그는 최고참 명예 회복을 위하여 특타를 자청했지만 심정수, [[진갑용]]과 함께 계속해서 부진하였고, 한때 [[현대 유니콘스|현대]]전에서 4타점을 치고,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등 부활하는 기미가 보였으나, 이내 다시 침묵하여 타율은 2할 4푼대까지 떨어지고 말았다.<ref name="두부2">{{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37&page=22&type=&values=|제목=양준혁 특타 자청 "최고참 명예 회복"|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4월 8일 |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
 
선동열 감독은 양준혁이 2할 4푼대까지 떨어지자 양준혁이 가장 안 좋았을 때는 타격감의 부활을 위해 최근 성적이 좋아진 심정수를 지명타자로 돌리고 양준혁의 타격감을 최대한 회복하도록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ref name="두부3">{{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21&page=22&type=&values=|제목='2할4푼대 부진' 삼성 양준혁, 26일 만에 대포 가동 타격|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5월 29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 }}</ref> 그러나 타격감은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혁은 2005년 시즌을 치르고 있는 도중에 [[장종훈]]의 [[한국 프로 야구 안타 관련 기록|최다 안타 기록]]과 같은 안타를 기록하여 타이를 이루고, 장종훈의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을 때에는 무려 380경기나 앞섰다. 양준혁은 부진으로 인해 9타석이나 안타를 기록하지 못해 삼성은 꽃다발을 만들었다가 폐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경신을 하였고, 그는 이후 1773개의 안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다 안타를 경신했을 때의 타율은 2할 3푼 8리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었다.<ref name="두부4">{{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12&page=21&type=&values=|제목=1771안타 양준혁 최다타이,장종훈 기록 깼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6월 22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 }}</ref><ref name="두부5">{{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403&page=21&type=&values=|제목=양준혁 최다 안타... 장종훈보다 380경기 먼저 쐈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6월 26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 타격 부진 끝에도 13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6월이 끝난 후에도 정확히 2할 3푼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고, 부진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 한 특타를 계속했지만 타격감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ref name="두부6">{{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397&page=20&type=&values=|제목=세상에 이런 일이… 천하의 양준혁 시즌 타율 2할 3푼|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7월 1일|출판사=일간스포츠}}</ref> 그는 2005년에 2할 3푼을 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을 때에 각 구단 전력 분석팀은 양준혁의 문제점을 상체만 돌고, 팔은 돌지 않는다는 점과 몸쪽 공에 있는 문제를 신경쓰다가 바깥쪽 공을 치는 데에까지 문제가 생겨 여러 투수들의 공격 포인트가 많아졌다고 지적했다.<ref name="두부7">{{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394&page=20&type=&values=|제목=신보순의 스카우팅 리포트 (9) 삼성 양준혁|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7월 8일|출판사=스포츠조선}}</ref> 7월 들어 갑작스럽게 높은 타율을 기록하였고, 1,593경기 만에 1800안타와 최다 득점을 세우는 등 여러 기록들을 세우게 되었다. 7월 이후로 다시 타율이 떨어졌고, 9월 들어 출장하는 경기가 적어져 13년 연속 100안타는 세우기 힘들 것으로 보였으나 [[한화 이글스|한화]]전에서 2안타를 추가한 뒤 LG전에서 대타로 안타를 추가하면서 13년 연속 100안타를 힘들게 기록하였다. 양준혁은 13년 연속 100안타를 기록한 뒤 타율 2할 6푼 1리와 13홈런 50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하였다.<ref name="두부8">{{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375&page=19&type=&values=|제목=양준혁 1593경기만에 1800안타|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8월 4일|출판사=스포츠투데이}}</ref><ref name="두부9">{{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358&page=18&type=&values=|제목=양준혁, 천신만고 끝에 얻은 13년 연속 100안타|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9월 20일|출판사=마이 데일리}}</ref>
 
그는 삼성이 여러 선수들의 활약으로 정규시즌을 우승하자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정규 시즌에서 잃었던 명예를 다시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까지 6타수 2안타를 기록했으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상대 투수 [[이재우 (1980년)|이재우]]에게 3점 홈런을 쳐서 팀 승리에 기여하였고, 이후 4차전에서 삼성이 승리하는 등 양준혁은 두 번째 우승을 맞게 되었다.<ref name="두부10">{{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349&page=18&type=&values=|제목=양준혁 '반창고 투혼'|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10월 18일|출판사=스포츠서울}}</ref><ref name="두부11">{{웹 인용| |url=http://www.yangjunhyuk.com/html/news/news_read.php?pos=347&page=18&type=&values=|제목=양준혁 "이제야 보답했다"|확인일자확인날짜= |확인월일=2월 18일 |확인년도=2009년 |연도=2005년 |작성월=10월 18일|출판사=연합뉴스}}</ref>
 
=== 2000안타 ===
199번째 줄:
|저자=김이지
|날짜=2007-06-10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6
}}</ref> 양준혁은 최초로 2000안타를 기록한 뒤 다음 후속 타자인 [[김종훈]]이 병살타를 기록함으로써 아웃되었지만 1루를 밟은 뒤 양준혁은 삼성의 선동열 감독과 두산의 [[김경문]] 감독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2000안타를 달성한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213번째 줄:
|저자=삼성 라이온즈 제공
|날짜=2007-06-15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6
}}</ref>
 
223번째 줄:
|저자=한우신
|날짜=2009-01-14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6
}}</ref> 그는 이후에 가진 기자 회견에서 "작은 모임이지만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는 말을 했고, 청소년 야구 육성을 통해 건전한 운동 문화에 힘쓰겠다고 말을 하였다.<ref name="성구회2">{{뉴스 인용
|제목=양준혁.'작은 모임이지만 많은 성원 부탁드려요'
230번째 줄:
|저자=김영민
|날짜=2009-01-13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6
}}</ref> 그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인용문2|
241번째 줄:
|저자=박현철
|날짜=2009-01-13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6
}}</ref>
 
251번째 줄:
|저자=옥철
|날짜=2009-05-09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5-09
}}</ref>
 
260번째 줄:
|저자=
|날짜=2009-05-09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5-09
}}</ref>
그의 최다 홈런 기록은 [[2013년]], 최다 타점 기록은 [[2016년]], 최다 득점과 루타 기록은 2017년 모두 [[이승엽]]이 경신하게 된다.
423번째 줄:
!기록 !!날짜 !!소속팀 !!상대팀 !!장소 !!경기 내용 !!종전 기록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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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통산 1홈런<ref name="통산 홈런">{{뉴스 인용 |이름 = |성 = |저자 =장현구 |제목 = 기록왕 양준혁, 홈런 역사도 바꾼다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254989 |형식 = |뉴스 = |출판사 =연합뉴스 |쪽 = |날짜 =2008-09-05 |확인일자확인날짜 =2009-02-13 |언어 =한국어 |인용 =}}</ref> ||1993.4.20 ||[[삼성 라이온즈|삼성]] ||[[해태 타이거즈|해태]] ||대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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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통산 100홈런<ref name="통산 홈런"/> ||1997.6.13 ||[[삼성 라이온즈|삼성]] ||[[현대 유니콘스|현대]] ||인천 || || ||
435번째 줄:
|개인 통산 300홈런 ||2006.5.3 ||[[삼성 라이온즈|삼성]] ||[[SK 와이번즈|SK]] ||대구 ||1회말, [[김원형]]의 초구를 받아쳐 좌측 펜스 넘어가는 투런 홈런 || ||역대 3번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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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150m 홈런<ref>{{뉴스 인용 |제목=<프로야구> 김동주 잠실 구장 첫 장외 홈런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0000710& |출판사=[[연합뉴스]] |저자=이상원 |쪽= |날짜=2000-05-04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2}}</ref> ||1997.8.1 ||[[삼성 라이온즈|삼성]] ||[[롯데 자이언츠|롯데]] ||사직 ||5회, [[김태석]]을 상대로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솔로 홈런 <ref>{{뉴스 인용 |제목=역대 최장거리 홈런은? |url=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421707 |출판사=[[스포츠서울]] |저자=이재국 |쪽= |날짜=2007-04-22 |확인일자확인날짜=2009-02-12}}</ref> || ||역대 4번째 기록
|-
|개인 통산 340홈런 ||2009.4.14 ||[[삼성 라이온즈|삼성]] ||[[한화 이글스|한화]] ||대구 ||1회말, [[안영명]]의 직구를 받아쳐 우측 펜스 넘어가는 홈런 || ||역대 2번째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