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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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황녀로서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 ‘이덕혜’(李德惠)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ref name="국적"/> [[일제강점기 조선|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의 강제적인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가쿠슈인|여자 가쿠슈인]]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옛 [[쓰시마 후추 번|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이즈음 [[조울증]], [[우울증|우울장애]], 반복성 우울 장애와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으며, 결혼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 이혼하였다.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엄밀히 황족은 아니며, [[일본]]의 왕공족 신분이었다. [[1962년]] 기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의 협조로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ref name="경향">{{뉴스 인용|제목=〈어제의 오늘〉 1989년 덕혜옹주 사망|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128799|저자=최민영|출판사=경향신문|날짜=2011-04-20|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29}}</ref>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남양주시)|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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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에 [[일제 강점기 조선|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다.<ref name="일출">{{저널 인용 |저자=권숙인 |날짜=2010년 2월 |제목=히노데소학교의 덕혜옹주 - 기억의 파편에 조우하며 |url=http://www.dbpia.co.kr/Article/3042112 |출판사=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저널=일본비평 |호=2 |쪽=252~266쪽}}</ref>{{rp|254}} 출산과 동시에 궁녀였던 양씨는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아 귀인으로 봉해졌으며, 덕혜옹주도 ‘복녕당 아기씨’(阿只氏)라고 불리게 되었다.<ref name="일출"/>{{rp|255}}<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0505025_002&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제목=덕수궁 궁인 양씨가 딸을 낳으니 양씨에게 복녕이라는 당호를 내리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2-05-25}}</ref> 같은 해 7월 13일에 고종은 덕혜옹주를 복녕당에서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 왔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0507013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제목=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가서 태어난 아지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돌아오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2-07-13}}</ref> 고종은 총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덕혜옹주가 사실상 유일한 딸이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203004_004&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제목=고종 황제의 행장|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9-03-04}}</ref>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정확히는 황족은 아니었으며, 일본의 왕공족 신분이었다.
 
[[1916년]] [[4월 1일]]에 [[고종 태황제]]는 덕혜옹주를 위하여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하였고<ref name="일출"/>{{rp|255}}, 쿄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로 촉탁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0904001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B3%B5%EB%85%95%EB%8B%B9+%EC%95%84%EA%B8%B0|제목=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여 복녕당 아기씨를 교육할 것을 명하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16-04-01}}</ref> 유치원은 [[준명당]]에 설치되었으며, 덕혜옹주는 귀족의 딸들 중 또래 7~8명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ref name="일출"/>{{rp|255}}<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14) 임신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08003292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08&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06&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6-08|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17년]] 6월 [[왕공족]]의 신분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고종 막내딸, 日서 정신병 앓다 정략결혼한 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pho&sid1=103&oid=025&aid=0002239669|저자=이영희|출판사=중앙일보|날짜=2012-12-11|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11}}</ref>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시종 김황진(金璜鎭)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26) 고종의 고심|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0600329209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06&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30&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7-06|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에도 덕수궁에 머물다가 고종의 혼전이 [[창덕궁]]으로 옮겨지자 [[1920년]] [[3월 15일]] 어머니인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내 한 전각으로 거처를 옮겼다.<ref name="일출"/>{{rp|255}}<ref>{{뉴스 인용|제목=고 이태왕 전하 아기씨, 아기씨도 청덕궁에 가시었다|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00317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0-03-17}}</ref>
 
=== 학창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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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가쿠슈인 ====
[[1925년]] [[정월]]에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음을 통고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27) 가엾은 덕혜옹주|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709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7-09&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32&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7-09|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같은 해 [[3월 28일]]에 경성을 출발하여<ref>{{뉴스 인용|제목=조선을 떠나시는 덕혜옹주|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50329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5-03-29}}</ref> [[3월 30일]] [[도쿄]]에 도착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동경에 안착 30일 밤에|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50401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5-04-01}}</ref>
[[4월 14일]]에 [[가쿠슈인|여자 가쿠슈인]](女子学習院) 중등과 2학년에 입학하였다.<ref name="의복"/><ref>{{뉴스 인용|제목=덕혜희 수업 14일부터|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50411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5-04-11}}</ref>
 
[[1926년]] [[3월 3일]] 덕혜옹주는 영친왕 내외와 같이 귀국하여 [[대한제국 순종|순종]]을 알현하였다가<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903003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D%95%ED%98%9C%EC%98%B9%EC%A3%BC|제목=왕세자 부부가 구주를 유람할 것을 청하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6-03-03}}</ref> [[3월 11일]] 도쿄로 돌아갔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903011_001&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D%95%ED%98%9C%EC%98%B9%EC%A3%BC|제목=왕세자 부부와 덕혜 옹주가 동경으로 돌아가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6-03-11}}</ref> 하지만 순종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전달 받고 영친왕 내외와 [[4월 8일]]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904008_002&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B%8D%95%ED%98%9C%EC%98%B9%EC%A3%BC|제목=왕세자 부부와 덕혜 옹주가 창덕궁의 환후가 심하다는 것을 전달받고 돌아오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6-04-08}}</ref> 순종은 [[4월 25일]] 승하하였고, 덕혜옹주는 순종의 인산에 참석하지 못한 채 [[5월 10일]] 도쿄로 돌아갔다.<ref>{{뉴스 인용|제목=경성을 나시는 덕혜옹주|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60510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6-05-10}}</ref>
 
1929년 [[5월 30일]] 어머니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생모 복녕당 별세|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05310020920202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05-31&officeId=00020&pageNo=2&printNo=3153&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29-05-31|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6월 2일]] 귀국하지만 귀인 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라 귀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복상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상하지 못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복녕당의 서거와 옹주 복상 문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060200209202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06-02&officeId=00020&pageNo=2&printNo=3155&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29-06-02|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6월 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성묘후 도동|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060900209202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06-09&officeId=00020&pageNo=2&printNo=3162&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29-06-09|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이후 옹주는 [[1930년]] 봄 무렵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등교를 거부하고,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어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9월 [[정신장애]]인 [[조현병]] 진단을 받게 되었다.<ref name="일출"/>{{rp|264}}<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39) 덕혜옹주의 발병|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100032920501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10&officeId=00032&pageNo=5&printNo=11960&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8-10|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31년]] 증세는 호전되었고,<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40) 구의 출생|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1300329205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13&officeId=00032&pageNo=5&printNo=11962&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8-13|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같은 해 [[3월 27일]] 여자 가쿠슈인 본과를 졸업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학습원 어졸업|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32800209202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3-28&officeId=00020&pageNo=2&printNo=3681&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31-03-27|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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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생활 ===
[[파일:Princess dukhye and takeyuki so, 1931.JPG|thumb|200px|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br/>(1931년)]]
덕혜옹주의 결혼 전에 배우자가 일본 황족과 [[조선귀족]] 중에서 선택될 것이라는 혼약설이 있었지만<ref name="유학"/>{{rp|79}}<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혼약?|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6083000209202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6-08-30&officeId=00020&pageNo=2&printNo=2148&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26-08-30|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ref>{{뉴스 인용|제목=18세 방년되신 덕혜옹주 혼사|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9110800209202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9-11-08&officeId=00020&pageNo=2&printNo=3314&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29-11-08|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30년 10월 [[소 다케유키]](宗武志)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옛 [[쓰시마 후추 번|쓰시마 번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으로 혼인이 결정될 무렵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ref>{{뉴스 인용|제목=명춘 어졸업 기다려 덕혜옹주 어혼|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0103100209202004&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0-10-31&officeId=00020&pageNo=2&printNo=3533&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30-10-31|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왕공족의 혼사는 칙허를 받아야 한다는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라 1931년 [[4월 14일]] 덕혜옹주의 결혼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내려졌고,<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어혼 5월 8일 예정|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41700209202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4-17&officeId=00020&pageNo=2&printNo=3701&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31-04-17|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같은 해 [[5월 8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순일본식으로 거행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어혼례 금팔일 거행|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5090020920201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5-09&officeId=00020&pageNo=2&printNo=3723&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31-05-09|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옹주의 혼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돌고 그녀의 혼인이 확정되자 옹주의 신하와 옛 친척들은 많은 반대를 보였다.<ref name="유학"/>{{rp|82}} 옹주는 결혼 당초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으며, 그녀의 조현병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당시의 모습을 본 이에 따르면, 전혀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ref name="일생">{{저널 인용 |저자=本馬恭子 |날짜=2011년 10월 |제목=德惠翁主의 일생 |url=http://www.dbpia.co.kr/Article/1575919|저널=아시아민족조형학회 출판기념 국제학술세미나 |쪽=30~37쪽}}</ref>{{rp|34}} 이후 옹주는 [[1932년]] [[8월 14일]]에는 딸 [[소 마사에]](宗正惠)를 낳았다.<ref name="일출"/>{{rp|264}}<ref>{{뉴스 인용|제목=이건공비전하 공자를 어출산|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2081600209202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2-08-16&officeId=00020&pageNo=2&printNo=4188&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32-08-16|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출산 이후 조현병(정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ref name="일출"/>{{rp|264}}<ref name="박정희"/>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자 [[소 다케유키]]는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덕혜옹주와 이혼하였고, 덕혜옹주는 호적에 어머니의 성씨인 양(梁)과 봉호(封號)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梁德惠)로 일가를 창립하였다.<ref name="일출"/>{{rp|264}}<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55) 고통과 가난의 시절|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917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9-17&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92&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9-17|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ref name="정범준">{{서적 인용|저자=정범준|제목=제국의 후예들|연도=2006|출판사=황소자리|id={{ISBN|89-91508-18-9}}}}</ref>{{rp|354}} 이혼 후에 소 다케유키는 혼례품 및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의 한복과 생활용품을 돌려보냈고, 영친왕 부부는 1956년 이 물품을 [[일본 문화학원]]의 전신인 문화여자단기대학의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ref>요시치카는 옛 [[오와리 번|오와리]] [[오와리 도쿠가와 가|도쿠가와 후작가]] 제19대 당주이다. 친아버지는 옛 [[후쿠이 번|후쿠이]]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마쓰다이라 후작가]] 제16대 당주 [[마쓰다이라 슌가쿠]]</ref>(徳川義親) 전[[후작]]에게 기증하였다.<ref name="정범준"/>{{rp|355}}<ref>{{뉴스 인용|제목=비운의 덕혜옹주를 기억하소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11&aid=0002287801|저자=조상인|출판사=서울경제|날짜=2012-12-10|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10}}</ref> 1947년 10월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면서 자금 지원은 중단되어 생계와 치료에 곤란을 겪게 되었으며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하였다.<ref name="박정희">{{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61) 박정희 장군과의 만남|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100100329209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10-01&officeId=00032&pageNo=9&printNo=12004&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10-01|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52) 가난한 평민으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910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9-10&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86&publishType=00020|저자=이방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4-09-10|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56년]] [[8월 26일]]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ref name="일출"/>{{rp|264}}<ref name="정범준"/>{{rp|357}}
 
=== 귀국 ===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등으로 활동한 [[김을한]]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하였고, [[1961년]] [[11월 12일]] [[미국]]을 방문하던 도중 일본 도쿄에 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였다.<ref name="박정희"/><ref name="정범준"/>{{rp|137}} 옹주는 입원한 [[1946년]] 이래 15년 가까이 마쓰자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ref name="일출"/>{{rp|264}} 귀국 당일 김포공항에 유치원과 소학교 동창 민용아(閔龍兒)와 당시 72세의 유모 변복동(卞福童)이 마중을 나왔고,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후에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의 환국 초야|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12700329103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2-01-27&officeId=00032&pageNo=3&printNo=4967&publishType=00010|저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62-01-27|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환국|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12700209103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2-01-27&officeId=00020&pageNo=3&printNo=12349&publishType=0001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62-01-27|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같은 해 [[2월 8일]]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였고,<ref name="국적">{{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국적 회복|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20900209103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2-02-09&officeId=00020&pageNo=3&printNo=12362&publishType=0001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62-02-09|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같은 해 [[3월 28일]]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하여 〈구황실재산법〉 개정법률안을 통과시켰다.<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에 생계비 개정법률안을 통과|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3290020910302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2-03-29&officeId=00020&pageNo=3&printNo=12410&publishType=0001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62-03-29|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67년]] [[5월 4일]] 병세가 안정되어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이후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였다.<ref name="일출"/>{{rp|264}}<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퇴원|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5090032920303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5-09&officeId=00032&pageNo=3&printNo=6636&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67-05-09|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전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관계자들에 의해 면담이 거부되었다.<ref name="정범준"/>{{rp|360}}
 
[[1970년]] [[10월 29일]] 자궁에 생긴 용종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입원|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103000209207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10-30&officeId=00020&pageNo=7&printNo=15096&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70-10-30|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83년 5월 24일에 노환으로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입원|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60100329202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6-01&officeId=00032&pageNo=2&printNo=11591&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3-06-01|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경에 창덕궁 수강재에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조선조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 별세|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42200209215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4-22&officeId=00020&pageNo=15&printNo=20787&publishType=0002|저자=|출판사=동아일보|날짜=1989-04-22|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4월 25일에 수강재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영결식이 엄수되었고,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남양주시)|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덕혜옹주 영결식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42500329211015&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4-25&officeId=00032&pageNo=11&printNo=13409&publishType=00020|저자=|출판사=경향신문|날짜=1989-04-25|확인일자확인날짜=2012-11-30}}</ref>
 
=== 사후 ===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알려지면서 1996년 [[MBC]] 광복절 특집 드라마 《[[마지막 황녀 덕혜]]》 등에서 남편 [[소 다케유키]]는 꼽추나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거나<ref>{{뉴스 인용|제목=감성적 애국주의를 넘어|url=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008/wk20100818091829105430.htm|저자=이윤주|출판사=주간한국|날짜=2010-08-18|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01}}</ref>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낭설이 유포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독자칼럼, 〈덕혜옹주〉 일본인 원작자의 편지/혼마 야스코|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2061427|저자=혼마 야스코|출판사=한겨레|날짜=2010-09-24|확인일자확인날짜=2012-12-01}}</ref> 하지만 소 다케유키가 쓴 시집 중 옹주를 대상으로 쓴 작품 등에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하고 있고, 그의 저금액 등을 살펴 보아도 생활에 곤궁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실제로는 아내를 고귀한 존재로 살피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생애동안 한국에 대한 비판이나 나쁜 말은 남기지 않았다.<ref name="일생"/>{{rp|35}}
 
옹주가 사용했던 유물은 한국과 일본에도 그리 많은 양은 남아있지 않으나, 유물이 소재한 몇몇의 위치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도쿄문화학원]]에는 조선 왕가로부터 기증 받은 옹주의 유물이 남아있는데, 그녀가 입었던 [[당의]]나 그녀의 딸 마사에가 사용한 유아복과 나막신 등이 소장되어 있다.<ref name="유물">{{저널 인용 |저자=朴允美 |날짜=2011년 10월 |제목=日本 所在 德惠翁主 遺物 |url=http://www.dbpia.co.kr/Article/1575922|저널=아시아민족조형학회 출판기념 국제학술세미나 |쪽=52~55쪽}}</ref>{{rp|53}} 이중 복식 7점([[당의]], [[스란치마|홍색 스란치마]], [[치마]], [[저고리|송화색 숙고사 반회장저고리]], 진분홍 저고리, [[풍차바지]], [[단속곳]])이 [[초전섬유퀼트박물관]] 관장의 오랜 설득 끝에 [[2015년]] [[6월 24일]] [[대한민국]]에 반환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었다.<ref>{{뉴스 인용 |저자=이세원 |제목=고종 고명딸 덕혜옹주 조선왕실 복식 7점 한국에 반환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6/24/0200000000AKR20150624038700073.HTML?input=1195m |뉴스=SBS |출판사= |위치= |날짜=2015년 06월 24일 |확인날짜=2015년 08월 20일}}</ref> [[큐슈국립박물관]]에는 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의 집안인 [[쓰시마]] 종가 집안에서 기증받은 유물이 남아있는데, 옹주가 사용한 식기, 옷감, 회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ref name="유물"/>{{r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