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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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경북대신문
|날짜=2006-10-04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6-22 }}</ref>
 
[[2010년]] 3월 대한민국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해당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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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오마이뉴스
|날짜=2006-10-02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6-22
}}</ref>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이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해주]]로 피신했다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은 [[경성부]]로 내려와 [[경성]]의 메이데이 행사에 참석, 축사를 낭독했고 타지역의 메이데이 행사에서도 그의 축전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메이데이 행사는 미군정에 대한 항거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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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대구일보
|작성일자=2007-02-08
|확인일자확인날짜=2008-06-22
}}</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도의 정치적 무권리와 민족적 불행,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하는 미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파쑈통치에 여기저기에서 반기를 들고나선 남조선인민들의 항쟁"으로 보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로동신문 10월항쟁용사들의 넋을 이어 반미투쟁을 과감히 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