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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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격무로 인해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어 온양으로 내려와 온천욕으로 질병을 치료했다. 이 기념으로 '온양'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그런데 세종은 온천 치료의 혜택이 백성에게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백성을 위한 온천탕을 만들고 백성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세종의 뜻에 대해 맹사성은 즉시 찬성하여 시행되도록 했다. 온양에 살았던 맹사성은 온천치료의 효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사성은 세종이 조선의 온천 복지 정책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ref>{{뉴스 인용|제목=고불 맹사성이 민족사에 남긴 세 가지 업적|url=http://ionyang.com/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146&idx=24128|출판사=온양신문|저자=김기승 교수|날짜=2011-04-22|확인일자확인날짜=2011-04-22}}</ref>
 
===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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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무가 아닌 일에는 결코 역마를 이용하지 않고, 소를 타고 다니거나 걸어다녔다 한다.
*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로 하였고, 바깥 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 결백한 맹사성의 성품은 요즘 사람들에게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ref>
{{웹 인용|url=http://www.asan.go.kr/asan/feature_1_2.asp|제목=아산시청 홈페이지 중 아산을 빛낸 사람들|확인일자확인날짜=2008-2-19}}</ref>
 
== 황희, 윤회와의 비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