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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최후 ===
[[1591년]](선조 24) 봄 동래 부사로 있다가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는 [[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여름 [[서인]]이 제거될 때 [[동인]]이 좌상(左相) [[정철]](鄭澈)을 논죄(論罪)하며, 그를 지목하여 [[정철]](鄭澈)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라 하였으므로, 사직하고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선조 25) 초, 그는 어느날 하늘의 별을 보고 이변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였다. 그 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의 한성 점령 소식 및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다는 소식을 듣고 [[담양군|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광주목사 [[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 5만 명이 수천 명의 왜군에게 [[용인]] 등지에서 참패하자 그는 격문을 돌려 6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이때5월 29일에 같이 의병을 일으킨 양대박(梁大樸), 광양 옥과 출신으로 성균관학유를 지냈던 유팽로(柳彭老) 등이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양대박은 전주로 가서 2천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1592년]] [[6월 1일]]에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을 시작, [[6월 13일]] 전주로 가서 아들 [[고종후]](高從厚)에게 영남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막게 하였다. 22일 충청도 여산(礪山)을 거쳐 27일 은진(恩津)으로 이동했다. 왜군이 금산을 점령하고 점차 호남에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연산(連山)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와 [[장흥]] 등에서 모집한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금을 지키러 의주로 가던 중 전주에서 군사를 정돈하여 말머리를 돌려 금산으로 갔다. 일본군이 금산에서 금산 관군과 의병을 전멸시키고 군수도 전사한 상태였다. 그는 금산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병력을 재정비하고, [[금산군|금산]]에 집결하고 있던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권지성균관학유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