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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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문세족 숙청과 친위세력 강화 ====
[[파일:King Kongmin of Koryo.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150px|고려 공민왕 영정 (조선후기작, 작자미상)]]
[[원나라]]의 지배력이 대폭 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은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폈다.<ref name="chung145">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45페이지</ref> 우선 친원 세력의 우두머리인 기씨 일족을 제거했다. 기씨는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자오의 딸을 중심으로 횡포를 부리던 인물들로, 기철 등이 있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공격,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관직 명칭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ref name="chung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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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 개혁의 실패 ====
[[파일:서울 마포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00px|[[조선]] 종묘 내에 있었던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 조선 건국후 [[이성계]]는 [[조선]]건국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고려 공민왕 내외의 영정을 그려 [[조선]]의 종묘에 봉안하였다. 이는 사실 고려가 공민왕 대에서 끝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자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왕비의 사후 그는 술과 여색으로 시름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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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과 서예 ==
[[파일:고려 공민왕작 염제신 상.jpg|thumb섬네일|150px|left왼쪽|공민왕이 직접 그린 《[[염제신]] 상》]]
[[파일:Cheonsandaeryeopdo.jpg|thumb섬네일|250px|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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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렬:공민왕, 고려}}
[[분류:고려 공민왕| ]]
[[분류:1330년 태어남]]
[[분류:1374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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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분류: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분류:고려 공민왕| ]]
[[분류:신돈]]
[[분류:양성애자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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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중세의 성소수자|왕기]]
[[분류:14세기 한국 사람]]
[[분류:14세기 한국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