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노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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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도쿠가와 이에쓰구|이에쓰구]]''', [[도쿠가와 도라키치|도라키치]] 등
}}
'''도쿠가와 이에노부''' ({{llang|ja|徳川家宣}}, [[1662년]] [[6월 11일]] - [[1712년]] [[11월 12일]])는 [[일본]] [[에도 막부]] 제6대 쇼군(재위 [[1709년]] - [[1712년]])이다.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손자이자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조카로, [[1709년]] 쓰나요시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쇼군직을 이었다. 아명은 '''도라마쓰'''(虎松), 초명은 '''쓰나토요'''(綱豊)이다.
 
== 생애 ==
[[1662년]] [[6월 11일]]([[간분]](寛文)2년 [[4월 25일]]) [[에도]] 네즈(根津)의 저택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고후(甲府) 번의 번주이자 재상인 [[도쿠가와 쓰나시게]](徳川綱重)이며, 모친은 [[조쇼인 (1637년)|조쇼인]](長昌院)이다. 장남이었으나 당시 19세였던 쓰나시게가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 하녀 신분인 26세의 조쇼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였던 탓에 가신 [[신미 마사노부]](新見正信)에게 맡겨져 '''신미 사콘'''(新見左近)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의 양자로 성장하였다. 생모 조쇼인은 [[1664년]] 사망하였다.
 
부친 쓰나시게에게 남자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자 9세 때 정식으로 인정을 받고 [[1676년]] 관례를 치른 뒤 백부이자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徳川家綱)로부터 편휘(偏諱)를 하사받아 쓰나토요(綱豊)가 되었다. [[1678년]] 쓰나시게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25만 석 번주의 자리를 계승한 뒤 조모인 [[준쇼인]](順性院)의 보살핌을 받았다.
 
[[1680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이에쓰나]]가 후계자 없이 중태에 빠지자 이에쓰나의 동생 [[고즈케 국|고즈케]] [[다테바야시 번|다테바야시(上野館林) 번]]주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와 함께 강력한 쇼군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신 [[홋타 마사토시]](堀田正俊)가 3대 쇼군 이에미쓰의 핏줄에 더 가까운 쓰나요시를 강력하게 추천하면서 쇼군 자리에서 탈락하고 쓰나요시가 5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쓰나요시마저 남자 후계자가 없자 쓰나요시의 사위인 [[도쿠가와 쓰나노리]](徳川綱教)와 다시 후계자 경쟁을 벌였으나 쓰나노리가 요절하면서 [[1704년]] 쓰나요시의 정식 상속인으로 인정받고 이에노부(家宣)로 개명한 뒤 에도성 니시노마루(西の丸)에 거처하였다.
 
[[1709년]] 쓰나요시가 사망하자 48세의 나이에 6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취임하자마자 선대의 악명 높은 [[겐로쿠 살생금지령|살생금지령]]을 폐지하여 백성들로부터 많은 인기와 기대를 얻었다. 또한 쓰나요시의 총신(寵臣)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를 면직한 뒤 고후 시절의 가신들인 [[마나베 아키후사 (1666년)|마나베 아키후사]](間部詮房), [[아라이 하쿠세키]]<ref>[[조토쿠의 치]](正徳の治)라 불리는 개혁을 주도했던 아라이 하쿠세키는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통신사 대접을 간략화하고자 했고, 「대군」이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嫡子)를 의미하는 칭호로 조선 국왕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일본국대군」이 아닌 「일본국왕」으로 바꿀 것을 제의하였다.</ref>(新井白石) 등을 등용하여 문치(文治) 정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악화되는 바쿠후의 재정을 염려하여 재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재위 3년 만인 [[1712년]] [[11월 12일]]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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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실 혼코인(本光院) : 斎宮
 
;그 외
* 양녀 마사히메(政姫) : [[고노에 이에히로]](近衛家熙)의 딸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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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에도 막부의 정이대장군]]
[[분류:조선 통신사 관련자]]
[[분류:17세기 일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