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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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에른의 통치자 ====
[[파일:Urkunde Ludwig der Deutsche Heilbronn 841 Detail.jpg|썸네일섬네일|왼쪽|130px|[[하일브론]] 시에 발송된 루트비히 2세 명의의 공문 ([[841년]])]]
 
[[825년]]에는 직접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위탁받아 826년부터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823년]] [[루트비히 1세]]의 계비 유디트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카를]]이 태어나고 829년 상속령이 개정되자 [[830년]], [[831년]], [[833년]] 형 [[피핀]]과 함께 아버지 [[루트비히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에는 한때 아버지 루트비히를 폐위시키고 계모이자 처형인 유디트를 수녀원에 감금하였다. 그러나 부왕 루트비히는 교황의 지지를 얻어 다시 권좌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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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토 분쟁 ====
[[파일:Ludwig_der_Deutsche.jpg|썸네일섬네일|오른쪽|140px|루트비히 시대의 [[동프랑크 왕국]]의 데나리온 동전]]
 
[[837년]] 아버지 [[프랑크의 루트비히 1세|루트비히 경건왕]]은 아헨 제국 의회, [[838년]] 네이메겐 제국 의회에서 더 많은 영토를 아들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왕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일단 [[로타르 1세]], [[아키텐의 피핀 1세]], 독일인 루트비히 등은 이 조치를 받아들였으나 감정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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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퐁트느와 전투와 베르덩 조약 ====
[[파일:Sacramenta Argentariae (pars longa).png|thumb섬네일|left왼쪽|150px|[[842년]] [[12월]] 서프랑크에서 카를 2세에 의해 작성된 [[스트라스부르 서약]] 선서문 사본]]
[[파일:Carolingian Empire map 1895.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00px|[[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참고|시민 전쟁 (840년)|퐁트느와 전투|스트라스부르 서약|베르덩 조약}}
[[840년]] 아버지 [[프랑크의 루트비히 1세|루트비히 경건왕]]이 죽은 뒤 큰형 [[로타르 1세]]가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이복 동생 카를과 손잡고 로타르에 대항하였다. 이때 [[아키텐]]의 분국왕이자 조카인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군이 [[로타르 1세]]에게 합류, 로타르를 도와주었다. [[로타르 1세]]는 [[817년]]의 제국 칙령에서 부여된 자신의 권리를 다시 주장,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841년]] [[7월 25일]]의 [[퐁트느와 전투]]에서 로타르를 깨뜨렸다. [[842년]]에는 [[작센]]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튀링겐]]의 [[공작 (작위)|공작]] 등이 이에 협조하여 로타르를 조여왔다. 패한 로타르는 결국 [[아헨]]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협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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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센 조약과 상속 분쟁 ====
[[파일:3 sons of Louis the German.jpg|thumb섬네일|200px|루트비히 2세와 그의 세 아들]]
 
[[855년]] [[로타르 1세]]가 죽자,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둘째 아들인 [[로타르 2세]]가 [[로타링기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로타르 1세]]가 죽자 바로 서프랑크의 대머리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 2세]]가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로타르 1세]]가 죽자 카를 2세는 형의 영토였던 로트링겐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독일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그를 막았다.<ref>이국헌, 《교회사 콘서트》 (한국학술정보, 2013) 169페이지</ref> 그러나 대머리 카를은 로트링겐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죽은 뒤에 다시 로트링겐을 넘보게 된다. [[로타르 2세]]에게는 적장자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인 루트비히와 [[카를 2세 (서프랑크)|대머리 카를]]은 조카 로타르가 죽은 뒤 [[로타링기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 (로트링겐의 왕자)|위그]]가 나타났고 [[869년]] [[로타르 2세]]가 죽었을 때, [[카를 2세 (서프랑크)|카를]]과 함께 위그를 사생아로 정하고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결혼은 무효로 선언한 뒤 [[로트링겐]]에서 추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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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 분할과 메르센 조약 ====
[[파일:Reichsschwert ludwig der deutsche.jpg|썸네일섬네일|왼쪽|120px|루트비히 2세]]
{{참고|로타링기아|메르센 조약}}
[[869년]] 초 셋째 아들 [[카를 3세]]가 봉토 배정에 불만을 품고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로타르 2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철군한다. [[869년]] [[로타르 1세]]의 아들 [[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 카를은 로타르 2세의 서자인 어린 [[위그 (로트링겐의 왕자)|위그]]를 제치고 [[로타르 2세]]의 영토를 공동 분할하기로 약속하였다. [[869년]] [[로타링기아]]에 도착한 대머리 카를은 자신이 [[로타링기아]] 전체를 정복했음을 선언하고, 자신을 스스로 황제이며 존엄한 자(Imperator Augustus)라고 선언했다. 이복 형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즉시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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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파일:Kaisludwd.jpg|썸네일섬네일|오른쪽|130px|[[함부르크]] 시청사 내에 있는 루트비히 2세의 동상]]
 
850년대 이후 사라센 인들의 이탈리아 남부 해안가 침략은 계속되었고, [[872년]] [[12월 14일]] 즉위한 [[교황 요한 8세]]는 루트비히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군사를 보내 이탈리아 남부로 들어오는 사라센 군 및 해적들을 상대하게 했다. 한편 그는 여러번 [[교황청]]에 교섭하여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수여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교황청]]은 그때마다 거부했다.
 
[[875년]] [[8월]] 조카이자 사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황제 루트비히 2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장남 [[카를로만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으나, 이복동생인 대머리왕 [[카를 2세]]가 그를 제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의 왕과 [[신성로마제국]]의 요한네스 8세 교황의 지지를 받아 제관을 차지하자, 루트비히는 로타링기아에 있는 카를의 영지에 쳐들어가려다 실패했다. 독일인 루트비히는 조카의 죽음과 유언이 공개되자 바로 셋째 아들 뚱보 [[카를 3세]]를 북이탈리아로 보내 [[프리울리]] [[후작]] [[베렝가리오 1세]]와 손잡고 [[카를만]]의 추대 협상을 지원했다. 그러나 카를은 재빨리 알프스를 넘어와 교황의 보호자는 자닌임을 선언하고 제관을 차지했다.
 
대머리 카를은 자신의 형 루트비히가 살아 있을 때에도 황제 직위를 욕심내어 세력을 이탈리아까지 확대했고, 형 독일인 루트비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죽자 [[라인 강]]까지 진출하려 했다.<ref name="ppkk44"/> 독일인 루트비히의 둘째 아들인 청년 루트비히가 작은 아버지인 카를과 담판하여 [[프랑켄]]과 [[작센]]에서 군대 소집권을 주기로 하고 전쟁을 종결했다.<ref name="ppkk44"/> 카를은 전쟁 노획물과 많은 선물을 받아 서프랑크로 귀환했다.<ref name="ppkk44"/>
 
[[874년]]경부터 부인 [[바이에른의 엠므]]가 [[뇌졸중]]으로 무기력해졌다. [[876년]] [[1월]] 부인 [[바이에른의 엠므|엠므]]의 죽음을 보았고, 그해,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차지한 [[카를 2세]]를 다시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던 중 그해 [[8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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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아들 [[루트비히 3세 (동프랑크)|소 루트비히]]에 의해 [[로쉬 수도원]](abbey of Lorsch)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920년]] [[로쉬 수도원]]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을 때 그의 시신은 분실된 상태였다.
 
황제관을 얻는 데도 실패했고, 로타르 1세의 아들인 황제 루트비히 2세가 죽은 뒤 자기 후손을 [[이탈리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 2세]]가 죽고 [[카를로만]]이 재빨리 [[알프스]]를 넘어가 이탈리아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영지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바이에른]]은 [[카를만]]에게, [[작센]]은 [[소루트비히]]에게 [[슈바벤]]과 [[알레 마니아]]는 [[카를 3세]]에게 넘겨졌다.
 
[[독일사]]와 [[오스트리아]]사에서는 루트비히를 [[독일]] 혹은 [[오스트리아]]의 첫 군주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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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카롤루스 대제]]
[[분류:프랑크 왕국의 군인]]
[[분류:9세기 유럽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