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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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설명 =
 
|작위 = [[파일:Heraldic Imperial Crown of Russia.svg|center가운데|30px|link=전러시아의 황제]] 제1대 [[전러시아의 황제]]
|재위 = 1721년 11월 2일-1725년 2월 8일
|전임자 = (신설)
|후임자 = [[예카테리나 1세|예카테리나 1세 알렉세예브나]]
 
|작위2 = [[파일:Monomakh hat.svg|center가운데|30px|link=러시아의 군주 목록]] 제11·12대 [[러시아의 군주 목록|전러시아의 차르]]
|재위2 = 1682년 5월 7일-1721년 11월 2일
|대관식2 = 1682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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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
==== 정치적 야인시대 ====
[[파일:Young Peter the Great of Russia.jpg|thumb섬네일|left왼쪽|황태자 시절의 어린 표트르]]
[[파일:Nevrev 019.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외국식 전통복 차림의 표트르]]
[[1672년]] 표트르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시키나 사이에서 알렉세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인 [[표도르 3세]] 또한 일찍 죽자 [[정신지체]] 장애인인 둘째 형 [[러시아의 이반 5세|이반 5세]] 대신 귀족과 [[러시아 혁명]] 전까지 러시아 [[정치]]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지를 얻어 [[차르]]에 올랐으나, 이복누이 [[소피야 알렉세예브나|소피야]] 공주가 주동한 쿠데타로 표트르를 지지한 귀족들이 숙청된 탓에 실권을 잃고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렘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활은 [[영국]], [[네덜란드]]등 서유럽 선진국가들에서 온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최첨단[[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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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제 군주가 되다 ====
[[파일:Capture of Azov 1696.png|thumb섬네일|left왼쪽|[[아조프 해]]의 포획]]
[[파일:Peter benois.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발트 해]] 기슭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아이디어를 명상하는 표트르 대제]]
그러던 중 [[1689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흑해 진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즉, [[터키]]와의 전쟁을 시작했으나 패배했고, 이를 계기로 귀족층이 소피야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을 기회로 자신을 따르는 소년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소피야를 정교회 수녀원에 유배보내고 국사를 장악하게 된다. [[1695년]] 오스만 제국과 재개된 아조프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군이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오스만군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함대를 이용하여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함대를 갖고있지 않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는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시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 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해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해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러시아의 이반5세|이반 5세]]가 죽었다. 이 때부터 표트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 통치와 개혁 ===
==== 서유럽의 기술공부 ====
[[파일:Peter in Holland.jpg|thumb섬네일|left왼쪽|[[네덜란드]]에서 조선술을 배우고 있는 표트르 대제]]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기술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부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으며 [[영국]]에 가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친히 배웠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 서유럽화 정책 ====
[[파일:KLEIDERREFORM IN RUSSLAND.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남자들의 수염을 깎는 모습]]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러시아 전통의상인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했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혁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스웨덴]]을 모델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해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또한 젊은이들은 [[유럽]]으로 유학 보내서 서유럽의 학문을 익히게 했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 전쟁 ===
==== 스웨덴과의 대결 ====
[[파일:Battle of Poltava 1709.PNG|thumb섬네일|right오른쪽|400px|[[폴타바 전투]]에서]]
 
바다로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이 필요했던 표트르는 [[1700년]] [[스웨덴]]의 [[칼 12세]]에 대항해 [[덴마크]], [[폴란드]]가 맺은 동맹에 참가하여 [[스웨덴]]과 [[대북방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기에는 전사 왕(戰士 王)으로 자칭할 정도로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난 [[칼 12세]]의 스웨덴 군에게 크게 패했으나([[1700년]] [[나르바 전투 (1700년)|나르바 전투]]), 표트르는 포기하지 않고 군을 재정비하여 다시 [[스웨덴]]에 도전, [[1709년]] [[폴타바]]에서 [[칼 12세]]가 친히 지휘하던 스웨덴 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폴타바 전투]]). 스웨덴으로의 퇴로가 끊긴 [[칼 12세]]는 남쪽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따라 [[1710년]] [[오스만 제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표트르는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루마니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트 강변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칼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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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 ===
==== 토목 공사와 철권 통치 ====
[[파일:Serov — Peter the Great.jpg|thumb섬네일|left왼쪽|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착수]]
[[파일: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를 심문하고 있는 표트르 대제]]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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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렬:표트르 1세}}
[[분류:표트르 1세| ]]
 
[[분류:1672년 태어남]]
[[분류:1725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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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동방 정교도 군주]]
[[분류:러시아의 동방 정교도]]
[[분류:표트르17세기 1세|유럽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