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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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시시감비스]], 아내는 [[스타테이라 1세]], 딸은 나중에 [[알렉산더 3세]]의 왕비가 된 [[스타테이라 2세]]와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된 [[드리페티스]]가 있다. 다리우스 3세의 화상으로 유명한 이 참고 사진은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에서 출토된 것이다.
 
== 생애 ==
[[기원전 338년]]에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환관이자 재상인 [[바고아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처형하고, 2년 후에는 유배된 그의 아들 [[아르세스]]마저 처형했다. 바고아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자를 왕에 앉히려고 왕가에서 갈라져나온 먼 친척인 '''코도만누스'''를 지정하여 왕에 임명했는데 그가 바로 다리우스 3세이다. 다리우스 3세의 아버지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조카였고 어머니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딸인 [[시시감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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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33년]]에 다리우스는 직접 페르시아 내륙에서 대군을 모아 출전했으나 11월 [[이수스 전투]]에서 패배해 도망쳤다. 그때 그의 어머니인 [[시시감비스]]와 처자식들이 알렉산드로스의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에게 강화하자는 편지를 2번이나 보냈고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막대한 재물을 주고, [[유프라테스 강]] 서쪽에 있는 페르시아 영토를 마케도니아에게 모두 넘겨주겠으며, 자기 딸과 결혼하라고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강화의 제의를 다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했다.
 
== 최후 ==
[[파일:Batalla de Gaugamela (M.A.N. Inv.1980-60-1) 02.jpg|thumb섬네일|230px|right오른쪽|[[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의 도주 (18세기 상아 부조)]]
 
이에 다리우스는 [[마케도니아 제국|마케도니아]] 군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건너게 하고 [[기원전 331년]] [[10월 1일]]에 지금의 [[이라크]] [[모술]]의 동쪽에 있는 [[가우가멜라 전투|가우가멜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해서, [[엑바타나]]로 피난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드로스]]가 추격하자 다시 동쪽으로 [[박트리아]]까지 피난하였지만 자신의 부하이자 [[바고아스]]의 친척이었던 [[베소스]] 일파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 전기 ==
* Prevas, John. ''Envy of the Gods: Alexander the Great's Ill-Fated Journey across Asia''. Da Capo Press, 2004.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Darius III of Persia}}
* [https://web.archive.org/web/20031018213726/http://www.gaugamela.com/ 다리우스의 상세 전기]
* [http://www.american-pictures.com/genealogy/persons/per01592.htm 다리우스의 족보]
* [https://web.archive.org/web/20110608215220/http://www.pothos.org/content/index.php?page=darius-iii Pothos.org: 다리우스 III (코도만노스)]
 
{{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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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분류:기원전 4세기 이란 사람]]
[[분류:기원전 4세기 통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