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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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세조 12) 율원도정(栗元都正), [[1467년]] 율원정으로 강작되었다가 이 해 [[5월]] 장용대장(壯勇隊將)에 임명되고, [[7월 2일]] 율원도정으로 총통도장(銃筒都將)에 겸임되었다. 같은 날 세조의 명으로 귀성군 이준, [[강순]] 등과 함께 여진족 토벌에 출정하였다. 7월 17일에는 각 군별 임무를 편성할 때 총통군(銃筒軍) 6백 명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공격하여 격퇴했다. [[8월 20일]] 회군하여 도총사 이하 장수들을 포상할 때 채단(綵段) 2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467년]](세조 13) [[9월 3일]]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그해 9월 20일 도총사 귀성군 이하 관원들을 포상할 때, 삼등 공신(三等功臣)으로 녹훈되고, 공신호(號)는 적개 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전토(田土)와 노비[臧獲]를 하사받고 작위가 군으로 승작되었다. [[9월 20일]] 함길 남도 병마 절도사(咸吉南道兵馬節度使) 율원군(栗元君)에 임명되었다. 12월 10일 병으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후임자로 천거된 권맹희(權孟禧)가 아버지의 병을 이유로 부임을 거부하므로 계속 함길남도 병마절도사를 맡아보았다. 12월 11일 세조가 친히 약물을 하사하여 12월 15일 내의(內醫) 차득참(車得驂)의 편에 보내 약을 주고, 진료를 하게 했다.
 
[[1476년]](성종 7) [[1월 18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왕릉골 곤좌(坤坐)에 있으며, 부인 무안현부인 동래정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