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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감리교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조약무효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김구]]와 [[이준]] 선생이 전덕기 목사와 함께 활동을 하였고,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던 [[상동교회|상동감리교회]]에서는 [[1907년]] 전덕기 목사와 교인들이 성금을 모아 [[헤이그 특사 사건|헤이그 특사]]들이 [[네덜란드]]까지 갈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같은 해 상동감리교회에서 [[신민회]]를 창설하여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도 전덕기 목사와 [[공동체]]에서의 사귐을 실천하였다. 월남은 양반이고, 전덕기 목사는 중인 출신의 숯을 만들어서 판매한 노동자계급이었지만, 이분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평등한 사귐을 실천했다.<ref>{{서적 인용|url=http://www.yes24.com/24/goods/5647232|제목=기독교 사회주의 산책, 새로운 역사를 향한 우리의 성서 읽기|성=이덕주|이름=|날짜=2011년 8월 31일|출판사=홍성사|확인날짜=}}</ref> [[전덕기]] 목사는 1912년 [[일본 제국|일제]]의 조작 사건인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 고문 당한 후 영면하였다<ref>"전덕기(全德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10년 1백만 구령운동을 제창했던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는 국권상실로 인한 국민적 수치와 비운을 벗어나 민족애국정신으로 이겨나가도록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으로 애국지사와 함께 수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