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 (193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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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5&aid=0000049579&
|출판사=SBS TV
|날짜=2005년 07월7월 19일}}</ref> 호텔 종업원이 수일 간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방문을 열어보자 화장실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객실 화장실에서 발견된 그의 시신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일자와 사망 시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본 경찰 측에서 입수한 자료도 단편적이고, 그 단편적인 자료조차 공개하기를 꺼려하여 무수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공교롭게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자리는 [[1931년]]에 그가 태어난 출생지로 일본 패전 후 [[영친왕]]의 경제능력 붕괴로 처분한 자리였다. 만년의 호텔에 머무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을 내려다보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구의 [[시신]]은 [[2005년]] [[7월 20일]]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운구되었으며, [[2005년]] [[7월 21일]] [[성복제]]에서 입관 전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 공개된 뒤, [[2005년]] [[7월 24일]] 대한민국 국무총리 및 문화재청장 등 각계 인사들과 시민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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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96&aid=0000021596
|출판사=SBS 생활/문화
|날짜=2005년 07월7월 24일}}</ref>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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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2&aid=0000085576&
|출판사=YTN TV
|날짜=2005년 07월7월 24일}}</ref>,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영원(英園)에 안장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영친왕 아들 이구 씨 영결식, 영릉에 안장(종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057976
|출판사=연합뉴스 생활/문화
|날짜=2005년 07월7월 24일}}</ref> 뒤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추증한 [[사시 (시호)|사시]](私諡)는 회은(懷慇)이고, 원호(園號)는 [[회인원]](懷仁園)이다. 따라서 회은태손, 회은황태손으로 부르나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는 이구를 황태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ref>이구가 태어날 때는 황태손에 봉할 주체인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굳이 그를 기념(紀念)하고 싶다면 행장(行狀)이 맞지 평민(平民)으로 죽은 이에게 아무리 사시(私諡)라도 시호(諡號)가 맞냐는 반론(反論)이 있다.</ref> 다만 [[1945년]] 일제 패망 직후부터 [[1947년]]까지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이구를 왕세자라고 보도하기도 했다.<ref>"舊王世子 李玖 外人商店 店員", 경향신문 1950년03월 31일자 2면, 사회면</ref><ref>"今日", 경향신문 1947년 05월 03일자 1면, 사회면</ref>
 
== 의혹과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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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6-10-808}}
 
* 비슷한 이름의 [[남연군|이구]](李球)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으로 그의 고조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