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 (193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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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혹과 논란 ==
==== 왕세자 대우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2-09-21}}
=== 의문의 죽음 ===
* 평소 건강에 이상이 없었고, 사망 3일 전까지도 건강했었는데 갑자기 죽었다는 점
* 의문사였는데, 부검하지 않고 육안으로만 사인을 추정한 점
* 후견인 노릇을 하던 나시모토([[의민황태자비]] 친정의 후계자-이방자의 여동생 노리코의 아들이 나시모토가를 이었다) 측에서 시신을 방부(표백) 처리(시신의 변색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하고 비밀리에 장례를 치르려 했던 점 등의 이유 때문에 독살을 숨기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주장만 제기되었을 뿐 별다른 조사는 없이 장례를 치렀고, 남아있는 자료라고는 육안 검시 기록(허혈성 심부전)과 나시모토의 증언(3일 전만 해도 건강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와서 갔더니 죽어있더라)뿐이다.
 
=== 지위 논란 ===
그의 생전 지위는 [[왕세자]]였다. 회은태손이라는 명칭에서 [[황태손|태손]](太孫)이라는 부분에 논란이 있다. 황제의 손자 가운데 정식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공인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명호(名號)가 바로 태손이다. 황제의 여러 손자 중에 [[원손]](元孫)이 결정되고, 원손이 나중에 태손으로 책봉되며, 아버지인 [[태자]]가 [[황제]]에 오르면 [[태손]]이 [[태자]]로 격상된다. 왕의 여러 아들 가운데 원자(元子) 명호를 받은 자가 나중에 [[세자]](世子)로 책봉되는 것과 같다.
 
이구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 중에 태어났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황태손]]이 될 수 없다. 또한 [[대한제국 순종|순종]] 황제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후에 태어난데다가, 그것도 한때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이왕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1926년]]에 승하하고 [[영친왕]]이었던 의민태자가 이왕의 자리를 계승한 다음에 태어났기 때문에, 생전의 신분을 최상급으로 표현해도 이왕의 아들인 왕[[세자]](王世子) 이상이 될 수 없다.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이구 [[황세손]](皇世孫)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문제점을 감안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방 후의에 대한제국 황실이 다시 복원되지 못하였으므로 태손이라고 책봉할 [[대한제국 고종|주체(황제)]]도 없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황제나 왕이 다스리는 군주국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의 지위를 황태손이나 왕세자로 봐야 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한때 임금이었던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폐위 뒤 임금이 아닌 왕자의 신분으로 연산군이나 광해군으로 불렸는데, 한때 세자 실질적으로는 왕손이었으나 자격이 박탈된 이에게 황손이라고까지 불러야 하냐는 말과 같다.
 
==== 왕세자 대우 ====
이구는 [[1945년]] 이후에나 부왕 [[영친왕]]의 사후에 직접적으로 한국의 왕위나 황제위를 요구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동안 한국 사회는 그를 왕세자로 대우하였다.<ref>자유신문 1950년 3월 31일자 기사</ref> 자유신문 1950년 3월 31일자 기사에는 그를 왕세자로 칭한 바 있다. 그밖에 [[경향신문]]의 3월 31일자 기사 2면에도 "舊王世子李玖 外人商店店員"이라 하여 이구를 왕세자로 보았다.
 
=== 정체성 논란 ===
실제로 그는 생전에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고, 한국보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언급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는가의 여부, [[일제 강점기]] 당시 침략자인 일본인이 모계 혈통이었던 점 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 후계 논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