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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30일]] [[선조]]가 피난을 결심하고 대가(大駕)가 [[의주파천|파천]](播遷)하였는데, 그는 집이 가난하여 [[말]]이 없어 임금의 어가를 호가(扈駕)하지 못하고 걸어서 [[고양]](高陽)으로 갔지만 어가는 이미 떠났으므로, 항상 관서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1592년]] 가을, [[남양]](南陽)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켜 기포(機捕)를 세우고, 향인(鄕人) 자제들을 거느리고 왜적과 교전하여 이겨, 왜적의 수급(首級)을 참획(斬獲)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5월 11일]] [[파주]][[목사]](坡州牧使)에 임명되었다. 파주는 서남(西南)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임진왜란]] 중 혹심한 병화(兵禍)를 입었는데, 이때 [[명나라]] 장수가 [[파주]] 경내에 들어왔으나 병사들을 이틀 동안을 굶기자, 크게 화를 내면서 새 목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가신이 부임하여 이르러 명함(名銜)을 들이고 만나기를 청하자 [[명나라]] 장수가 공의 의도(儀度)가 비범한 것을 보고는 즉시 읍(揖)하면서 말하기를 '고을에 군량이 부족한 것은 모두 고을의 기강이 해이하고 서리(胥吏)들의 죄이다.'하니, 공이 공수(拱手)하며 사례하기를, '죄가 실로 목사에게 있으니, 목사가 어찌 감히 죽기를 사양하겠습니까?'하였다. 그러자 [[명나라]] 장수가 두 손을 들면서 말하기를 무릇 인정(人情)은 모두 잘못된 것을 남에게 미루려고 하기 마련인데, 지금 대인(大人)만은 유독 그렇지 않으니 남보다 훨씬 어질다고 하였다.
 
바로 그는 [[파주]][[목사]]로 부임하자마자 [[체찰사]]부에 통보하여 쌀 수백 곡(斛)을 얻어 급히 [[명나라]] 구원군의 굶주림을 해결하였다. 얼마 뒤 서생(書生)인 그가 군무(軍務)를 맡아 적을 막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파주]][[목사]]직에서 체직되고 무신(武臣)을 대신 임명되었다. 그가 [[파주]]를 떠나는 날 고을 백성들이 노소 없이 나루까지 나와 울부짖다가 돌아갔다 한다. 면직된 뒤 호우(湖右)로 가서 우거하였는데, 이때 온집안 식구가 굶주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