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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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초반 ===
==== 학행과 출사 ====
[[1571년]](선조 4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기대정(奇大鼎) 등과 함께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제수되었고, [[1573년]](선조 6년) [[12월]]에는 산림으로 6품에 승서되었다. [[1574년]](선조 7년)에는 재행(才行)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옮기고, 이후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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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관으로 있을 때 그의 친구가 [[이조]]에 있으면서 인물을 제대로 천거하지 못하자, 그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이 친구를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1578년]](선조 11) [[6월]] 분양(分養)한 말을 길들이지 않은 일로 추고받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한편 [[동인]]과 [[서인]]의 갈등으로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 등 여러 사람이 [[이이]](李珥)를 탄핵하면서 [[이이]]가 [[불교]][[승려]]라고 성토하였다. 이들은 이이를 비판하면서 [[이이]]가 장삼입은 [[승려]](緇髡)가 되었다는 과거를 들먹이면서 비판, 배척했고, 그는 이를 두고 이는 군자(君子)가 할 언론(言論)이 아니라며 [[송응개]], [[허봉]] 등을 비판하였다.
 
[[1579년]](선조 12년) 계모상으로 사직하고 3년상을 하였는데, 3년상을 하면서 의절(儀節)을 하나같이 예제(禮制)대로 하였다. 상복을 벗고는 동생 [[홍경신]]과 차마 서로 떠나지 못하고 마침내 3년상을 하던 곳에 집을 짓고 같은 원장(垣墻) 안에서 살았다.
 
==== 계미삼찬과 기축옥사 ====
{{참고|계미삼찬|기축옥사}}
 
한편 [[1583년]](선조 16년) [[동인]]과 [[서인]]의 갈등으로 [[송응개]](宋應漑)와 [[허봉]](許篈) 등 여러 사람이 [[이이]](李珥)를 탄핵하면서 [[이이]]가 [[불교]][[승려]]라고 성토하였다. 이들은 이이를 비판하면서 [[이이]]가 장삼입은 [[승려]](緇髡)가 되었다는 과거를 들먹이면서 비판, 배척했고, 그는 이를 두고 이는 군자(君子)가 할 언론(言論)이 아니라며 [[송응개]], [[허봉]] 등을 비판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여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가 [[1584년]](선조 17년) [[안산]][[군수]](安山郡守)로 부임하였다. [[안산]][[군수]] 재직 중 지방관 근무성적 고과를 최상(最上)으로 받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영전하였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치적을 쌓아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1588년]] [[조헌]] 등이 상소를 올려 그를 [[허봉]]의 일당으로 비토하기도 했다.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 [[기축옥사]]로 확대되자 그는 평소 겨울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백유함]](白惟諴) 등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몇 년 동안 집에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