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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dgar Germain Hilaire Degas 069.jpg|섬네일|왼쪽|250px|''Tänzerin mit Blumenstrauß (Der Star des Balletts)'' ([[1878년]]경)]]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앵그르]]의 제자인 [[루이 라모트]]의 소개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다. [[1856년]]부터 1년 간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의 거장, 특히 [[도메니코 기를란다요|기를란다요]], [[만테냐]]의 작품을 배우고, 또 [[니콜라 푸생]]과 [[한스 홀바인]]의 그림도 배웠다. [[1865년]]에 살롱에 《[[오르레앙 시의 불행]]》을 출품하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후,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였으나 뒤에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ref>{{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ref> 1870년대 전반기에는 그는 자신이 선호하는 두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오페라 극장(특히 발레리나)과 롱샴 경마장의 경주가 그것이다.<ref>{{서적 인용|url=|제목=천년의 그림여행 p266|성=스테파노 추피|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1872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루이지애나 주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스]]로 떠나 미국의 역동성을 목격했다. [[1873년]] 파리로 돌아와 인상주의 화가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말년에는 지병인 눈병이 악화되어 시력을 거의 잃는 바람에 주로 조각에 몰두했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 모친의 외도와 불륜을 지켜본 상처가 큰 탓에 여성을 혐오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 되고 만다.
 
초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을 그렸으나 후기 그림은 일상 생활을 하는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