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주니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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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Martin-Luther-King-1964-leaning-on-a-lectern.jpg
|출생일 = [[1929년]] [[1월 15일]]
|출생지 = [[미국]] [[
|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968|4|4|1929|1|15}}
|사망지 = [[미국]] [[
|사망원인 = 암살 (화기에 의한 사망)
|직업 = 목사,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흑인운동가, 인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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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
[[1960년]]대에 [[흑인]] 권리 운동과 인권 운동을 통해 일정의 법률적인 결과를 획득하였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맬컴 엑스]]의 폭력주의 노선에 반대하고 비폭력적인 저항 운동을 주도하다. [[1968년]] [[4월]] [[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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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과 가계 ===
[[파일:Martin Luther King Sr, c1977-81.jpg|섬네일|150px|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 [[목사]]]]
마틴 루터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
그의 아버지쪽 선조들은 [[아일랜드]]인과 [[아프리카]]인의 혈통이 섞인 아이리시-아프리카 계열 흑인이었다.<ref>[http://mlk-kpp01.stanford.edu/index.php/encyclopedia/encyclopedia/enc_king_james_albert_1864_1933/ King, James Albert (1864-1933)]</ref> 증조부 [[나댠 번햄]](Nathan Brannum)은 [[침례교]] 목사가 되었고, 증조부 나댠 번햄이 성씨를 킹(King)으로 하면서 그의 집안 성씨는 킹이 되었다. 한편 어머니 쪽으로는 부분적으로 백인의 혈통을 타고났는데, 어머니의 할아버지 윌리엄 넬슨 윌리엄스(1804 ~ 1863)와 어머니의 증조부 윌리엄 윌리엄스(1772 ~ 1835)와 레이첼 넬슨 (c.1774 ~ 1851)는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 백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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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에 그는 [[침례교|침례교회]]에 다니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회의적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13세 되던 해 [[부활절]]에 침례교회의 [[주일학교|주일 학교]]에서 그는 "의심을 버리고 가차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성서]]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로 생각하고 [[신학교]] 진학을 결심한다.
그뒤 [[모어하우스 대학교|모어하우스 대학]] 신학과에 입학, [[모어하우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
=== 인권, 사회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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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ng portrait.gif|섬네일|210px|마틴 루터 킹 2세의 초상화]]
[[1954년]] [[
이 사건을 계기로 펼쳐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지도하고, 다른 [[흑인]] 및 양심적인 백인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하여 5만의 시민이 동참했다. [[흑인 해방]]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56년]] [[12월]]에는 [[미국 연방 최고 재판소]]에서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판결을 얻어낸다. 이후 [[애틀랜타]]의 침례교회 목사로 있으며 [[미국]] 각지의 [[인권]]운동을 지도했다. 당시 마틴 루터 킹 2세와 같이 인종차별반대운동에 참여한 동역자로는 [[장로교]] 목사인 [[윌리엄 슬로언 코핀]]([[1924년]]-[[2006년]]), [[침례교]] 목사인 [[랠프 애버내시]]([[1926년]]-[[1990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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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옥과 석방 ====
[[파일:Photograph of White House Meeting with Civil Rights Leaders. June 22, 1963 - NARA - 194190 (no border).tif|섬네일|왼쪽|250px|[[린든 존슨]]과 [[로버트 케네디]]와 함께 ([[1963년]] [[7월 22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3년]] [[4월 12일]] [[
관 앞에서 행한 [[연설]]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인종 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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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br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그 꿈이 있습니다!<br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미국의 대통령|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하다. 이후 여러 지식인들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인종 차별 철폐 운동에 비흑인 지식인들도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킹은 노동자들이 노동기본권인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으로써 자본가와 투쟁하는 계급투쟁 곧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멤피스 (
{{인용문2|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빈곤]]을 종식시키고,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노동자]]로서의)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합니다.'''|마틴 루터 킹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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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화원 파업지도와 암살 ====
그는 [[맬컴 엑스]] 등의 활동은 극단적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 양심을 죽이느니 차라리 앨라배마의 고속도로에서 죽겠다'며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나 일부 [[백인]] 지도자들의 타협 주장 역시 거절하였다. [[1968년]] [[
한편 그를 [[암살]]하기 위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사람을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그의 귀에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다고 답했다. [[4월 3일]] 열린 흑인 청소노동자 모임에서도 이 소문을 접한 흑인 청소노동자들은 그에게 피신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킹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역시 오래 살고 싶다. 나라고 왜 오래 살고 싶지 않겠나?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싶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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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워싱턴 D.C.]]와 다른 도시들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흑인들은 도시 중심부에서 방화와 건물, 차량 파괴, 약탈 등 폭력시위를 했지만 그의 뜻이 아니라는 일부 흑인 지도자들의 자제 요청과, 수천명의 군인, 경찰이 출동하면서 시위대는 저절로 해산되었다. [[제임스 얼 레이]]는 바로 배편으로 [[영국]]으로 도망쳤으나 [[런던 시]]내에서 그를 본 목격자의 제보로 체포되어 다시 [[
폭력 노선과 흑인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다른 흑인 지도자들과 달리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많은 지지자를 획득했고 흑인도 인간이라는 시각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1986년]]부터 미국에서는 그를 기려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정하고 연방 정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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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륜 사건 ===
[[1968년]]에는 [[
후버는 보고서를 작성, [[1968년]] [[2월 20일]]자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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