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0번째 줄:
|형제= 이복형 허옥(許沃) / 동복동생 허징(許徵)
}}
'''허준'''(許浚, [[1539년]] ~ [[1615년]] [[10월 9일]])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생전의 관직은 종1품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으며, 사후엔 정1품 보국숭록대부 양평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경상우도수군절도사 허곤(許琨)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 허론(碖)이다
 
[[동의보감]]의 저자이며, 동의보감 외에도 [[조선 선조|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종결 후, 각종 [[중국]]의서와 기존 의서의 복원, 편찬 및 정리에 힘썼다. 그밖에도 [[한글]]로 된 의서인 《[[언해두창집요]] (諺解痘瘡集要)》, [[산부인과]] 관련 의서인 《[[언해태산집요]]》, 기본 가정의서인 《[[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 등도 집필하였다. 한때 [[1543년]]생으로 알려졌으나 문장가 최립(崔笠)의 문집 《간이집(簡易集)》에 수록된 증송동경 대의 허양평군 환조자의주(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에서 최립이 그가 의주로 귀양가게 되던 1608년경의 일을 기록하면서, 허준이 자신과 동갑내기인 1539년생이라는 것을 언급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26번째 줄:
== 생애 ==
=== 어린 시절 ===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현, [[파주시]])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고향은 [[6.25 전쟁]] 이후로 [[파주시]]로 편입된다.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허준의 아버지는 용천부사 허론(許碖) 또는 허륜(許碖)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장단도호부]] 임강면 우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글을 익혔으며, 다방면의 학문에 통달(通達)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를 어우르는 동양의 종합적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허준의 학문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훗날 [[동의보감]]의 집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버지는 허론(許碖)이고 어머니는 그의 첩인 일직손씨(一直孫氏)로 손희조(孫熙祖)의 딸이다. 아버지 허론에게는 본부인인 윤희경(尹希璟)의 딸 윤씨와 재혼한 영광김씨가 있었는데, 후일 미암 [[유희춘]]은 자신의 저서 [[미암일기]]에서 김시흡(金時洽)을 허준의 적삼촌(嫡三村) 외숙부라고 기록하였다.
 
소설, 민간 전승에서는 그가 [[경상도]] 산음현의 전설적인 의사인 유의태(柳義泰)라는 인물에게서 의술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존여부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와 비슷한 동명이인인 [[한의사]] 유이태(劉以泰) 또는 유이태(劉爾泰)는 [[조선 정조|정조]] 때의 인물로 그의 스승이 될 수는 없다.
 
=== 의관 출사 ===
[[1569년]](선조 3년) [[6월]]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한성부]]로 가, [[유희춘]] 부인의 병을 고쳤다. [[유희춘]]이 허준을 언제 처음 만나 알게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유희춘은 그해 [[음력 6월 3일]]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소개하였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미암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궁중 의사, 곧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부]] 장안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허준 관련 전설과 민간 전승, 그리고 이를 소재로 하여 쓰여진 각종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그가 의과 급제자로, [[1574년]]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의과 급제자 기록에는기록인 방목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대신

[[1571년]](선조 5) 당시 종4품 내의원첨정을[[내의원]]첨정에 지내고재직중에 있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이며, [[1573년]]에는 정3품 통훈대부와 [[내의원]]정에 올랐다. 비록 의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동료 의관들보다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선조 11)에는 갑자기 심신이 허약해진 [[조선 선조|선조]]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어 수고로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이때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함께 사슴가죽 1장을 선물로 하사받았다. 이후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인빈 김씨]]의 아들)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으로 승진했다. 허준이 당상관에 가자(되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와 [[의금부]]에서 일제히 나서서 탄핵,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 임진왜란 이후 ===
줄 35 ⟶ 43:
 
=== 유배와 말년 ===
 
[[1608년]] [[음력 2월]] 선조가 병세가 급박하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종래의 예에 따라 조정 신하들의 갖가지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3월 17일]] 파직당하고 [[공암|공암(孔巖)]]으로 문외출송되었다. 문외출송(門外黜送)이란 유배의 일종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한성부의 사대문 밖, 곧 지방으로 추방하는 형벌이었다. [[광해군]]은 허준을 빠른 시일내에 복귀시키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허준은 이런 와중에와중에도 이미 [[1596년]]부터 왕명으로 편찬하고 있던 [[1610년]](광해군 2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15년여의 연구 끝에 편술을 완료하였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계속, [[18세기1609년]]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 해 [[음력 11월 22일]](양력 [[1611년광해군]] [[1월석방 5일]])명령을 귀양이내릴 풀리고때까지도 신원(伸冤)되어계속 내의원에 복직하였다집필하였다.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양력 [[10월 9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달에 광해군은 허준의 관작을 그의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하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 해 [[음력 11월 22일]](양력 [[1611년]] [[1월 5일]]) 귀양이 풀리고 신원(伸冤)되어 내의원에 복직하였다.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양력 [[10월 9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다른 설에는 일본인 쓰기무라(三木榮)의 《조선의사연표 (朝鮮醫事年表)》 p.337에는 허준이 1615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1615년]] [[11월]] 광해군은 허준의 관작을 그의 생전에 보류되었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 하계)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 사후 ===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파주시)|진동면]] 하포리의 민간인통제구역(DMZ) 안에 허준과 부인 [[안동 김씨]] 그리고 생모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이 묘소는 6.25전쟁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1991년]] [[9월 27일]] 군사 협조 아래 역사학자 이양재 교수와 종친회, 그리고 허준선생기념사업회의 조사활동으로 다시 발견되어, 현재는9월 완전히31일 재정비되어있다KBS 취재진과 허준선생기념 사업회 창립준비위원회 임원들에게 처음 공개되었으며 이후 재정비되었다. 인근에는 허준의 8대손 허규의 묘소까지 소재해 있다.

그의 묘소는 [[2006년]] 5월 군사안보 관광 구역으로 공개되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공원인 [[구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가족 관계 ==
* 할아버지 : 경상도우수사 허곤(許琨)
* 아버지 : 용천부사(龍川府使) 허륜
* 적모 : [[일직 손씨]]윤씨
* 적계모 : 영광김씨
* 어머니 : [[일직 손씨]]
* 이복형 : 허옥(許沃)
* 생모 : [[영광 김씨]] 김욱짐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