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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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후 ===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1595년]](선조 28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침치료를 시술하였다. 이때 내의원(약방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림)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참여하였다. [[1596년]] 이후 허준은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의서를 편찬,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선조 33년) 정2품 지중추부사를 겸직하던 수의(실직으로서 내의원의 최고서열)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올랐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으로 강격되었다.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종1품상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1606년]] 이어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정1품하계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가자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 유배와 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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