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헤이우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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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산업노동자연맹 ===
1904년 말, 노동계 급진파의 두드러진 인물 여럿이 [[일리노이 주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새로운 혁명적 노조를 만들기 위한 회동을 가졌다.<ref name=stjohn>For an official account, see: Vincent St. John, [http://www.iww.org/culture/official/SaintJohn1.shtml ''The IWW: its History, Structure and Methods.''] Chicago: IWW Publishing Bureau, 1917.</ref> 선언문이 작성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이 선언문에 동의한 노동운동가들이 새로운 노조를 창설하는 대회에 참여하기로 함으로써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 발족했다.
 
1905년 6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헤이우드는 시카고 브랜드홀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ref name=zinn-329-330>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pp. 329–330.</ref> 미국 전역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광부, 노동조합 운동가, 반체제적 노동자 등의 단체들에서 골라 보낸 대표자들 200명이 청중이었다. 헤이우드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제1차 세계산업노동자연맹 대회]]를 개회했다.<ref name=zinn-32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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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 혐의 재판 ===
[[파일:Haywood, Moyer, Pettibone.jpg|thumb|right|재판 피고들인 [[찰스 모이어]], 빌 헤이우드, [[조지 프티본]]의 사진. 1907년 촬영.]]
1905년 12월 30일, 전 [[아이다호]] 주지사 [[프랭크 스투넨버그]]가 [[칼드웰 (아이다호 주아이다호주)|칼드웰 시]]에 소재한 자택 앞에서 폭탄살해를 당했다. 스투넨버그는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WFM과 여러 번 충돌했었다. WFM 총재 [[찰스 모이어]]의 경호원이었던 전 WFM 조합원 [[앨버트 호슬리|해리 오차드]]<ref name="Haywood, 158">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158.</ref> 가 용의자로 체포되었고, 그가 묵고 있던 여관 방에서 증거가 발견되었다.<ref>Peter Carlson, ''Roughneck: The Life and Times of Big Bill Haywood.'' New York: W.W. Norton, 1983; pg. 87.</ref> [[핑커톤]] 소속 유명 사립탐정 [[제임스 맥파를랜드]]가 수사를 맡게 되었다. 맥파를랜드는 [[몰리 맥과이어스]]에 프락치로 침투하여 그 조직을 파괴시킨 혁혁한 전과가 있었다.<ref>Carlson, ''Roughneck,'' pg. 88.</ref>
 
재판도 하기도 전에 맥파를랜드는 오차드를 보이스 감화소에 사형수로 집어넣고 식사 배급을 제한하며 삼엄하게 감시했다. 맥파를랜드는 수사 준비를 마친 뒤 오차드를 만나 호화로운 점심식사를 하고 [[여송연]]을 피게 해 주었다.<ref>Carlson, ''Roughneck,'' pg. 89.</ref> 이 핑커톤 탐정은 오차드에게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은 WFM 지도부를 이 일에 연루시키는 것이고, 그러지 아니하면 즉결 교수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을러댔다.<ref>Carlson, ''Roughneck,'' pg. 90.</ref> 교수형으로 협박한 뒤 맥파를랜드는 식사, 담배, 보다 좋은 처우를 약속하고, 오차드가 협조한다면 어쩌면 풀어줄 수도 있고 심지어 재정적 보상도 받을 수 있으리라 꼬드겼다.<ref>Carlson, ''Roughneck,'' pp. 89–91.</ref> 그 결과 탐정양반은 피의자에게서 최소 17건 이상의 [[모살]]을 포함한 여러 범죄 64페이지 분량의 자백서를 받아냈다.<ref>Carlson, ''Roughneck,'' pg. 91.</ref>
 
맥파를랜드는 오차드의 위증 자백서를 이용해 WFM 지도부가 슈토넨버그 모살 당시 그 현장에 있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웠다.<ref name="Carlson, 93">Carlson, ''Roughneck,'' pg. 93.</ref> 그리고 주 경계를 넘어 [[콜로라도 주콜로라도주]] [[덴버|덴버 시]]에서 헤이우드, 모이어, [[조지 프티본]] 3인을 체포했다.<ref name=linder /> 1906년 2월 17일, 맥파를랜드는 3인을 특수 열차에 태워 덴버 시법원이 개입하기 전에 아이다호로 빼돌렸다.<ref>Carlson, ''Roughneck,'' pp. 93–94.</ref> 노조 조직가들은 이 과정을 납치 계획으로 간주했다.<ref name="Carlson, 93"/> 이 유괴행위는 너무 터무니없어서 WFM과 전혀 사이가 좋지 않은 [[미국노동총연맹|미국노총]](AFL) 총재 [[새뮤얼 곰퍼스]]가 자기 조직에 변호를 위한 기금을 모을 것을 지시했을 정도였다.<ref>Carlson, ''Roughneck,'' pg. 97.</ref> [[미국 대법원|대법원]]에 청원한 [[인신보호청원|인신보호]]는 기각되었다. 이에 반대한 사람은 [[조지프 맥케나]] 대법관 뿐이었다.<ref>Carlson, ''Roughneck,'' pg. 101.</ref>
 
헤이우드의 재판은 1907년 5월 9일에 시작되었다. 시카고의 유명한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가 변호인으로 나섰다. 정부측은 오차드의 자백 외에는 다른 증거가 없었고,<ref>Carlson, ''Roughneck,'' pg. 107.</ref> 대로는 오차드의 과거를 확인하여 그에게 폭력적 전과가 이미 있었음을 밝혀냈다. 다만 대로는 오차드에 대한 대질신문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ref name=linder /> 재판 도중 오차드는 자신이 [[광산소유주협회]]에 돈을 받은 정보원으로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으며,<ref>Carlson, ''Roughneck,'' pg. 119.</ref> 핑커톤 사립탐정들에게 돈을 받았고, 모이어나 헤이우드를 만나기 전에도 광산쟁의에서 폭발물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자백했다.<ref>Carlson, ''Roughneck,'' pg. 138.</ref> 대로의 최종 변론 이후(많은 방청인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ref name=linder /> 배심원단은 헤이우드가 무혐의라고 선고했다. 뒤이은 조지 프티본의 재판에서도 대로는 재판이 질질 끌리기 전에 오차드와의 대질로 강력한 변호를 이끌어냈으며, 이후 덴버의 [[오린 힐튼]]에게 변호를 넘겼다.<ref>{{Google books|이탤릭체=예 |title=Clarence Darrow: Attorney for the Damned |page=188 |id=gd11gB_4K1kC }}</ref> 두 번째 배심원단이 프티본도 무혐의라고 선고하자 모이어에 대한 기소는 아예 취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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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스 섬유 파업 ===
[[파일:11-haywood-bohn.jpg|thumb|right|250px|헤이우드는 산별노조 원리에 대한 대중적 소개서를 1911년 [[찰스 H. 커 출판회사]]를 통해 발행했다.]]
빌 헤이우드가 WFM을 떠나 IWW를 조직하고 있을 때쯤 [[메사추세츠 주]] [[로렌스 (매사추세츠 주매사추세츠주)|로렌스 시]]에서 그 유명한 [[로렌스 섬유 파업]]이 터져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1912년 1월 11일, 로렌스 시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항의하여 일손을 놓았다. 1주일 만에 2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IWW는 이미 로렌스 현지에서 활동하며 파업 지도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관계자들은 경찰을 부르는 것으로 응답했고, 파업은 급격히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현지의 IWW 지도자 [[조지프 제임스 에토르|조지프 에토르]]와 [[아르투로 지오바니티]]가 파업에 참여한 여공 [[안나 로피조]]에 대한 모살 혐의로 구금되었다.<ref>Fred W. Thompson, ''The IWW: Its First Seventy Years 1905–1975.''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1976; pg. 56.</ref> 그러나 그녀가 경찰 발포에 의해 사망했음을<ref>Carlson, ''Roughneck,'' pg. 166.</ref> 확인한 목격자가 열아홉 명이나 있었다.<ref>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249.</ref>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헤이우드를 비롯한 조직가들이 로렌스로 내려가서 파업을 맡기로 했다. 이후 수 주에 걸쳐 헤이우드는 파업의 여러 전술적 결정사항들을 지휘 또는 승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전술은 파업 노동자들의 굶주린 아이들을 뉴욕과 버몬트로 보내서 동정을 유발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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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우드는 정부가 사측의 편을 들어 광부들의 열망을 짓밟는 데 동참하는 것을 숱하게 목격했다.<ref name=carlson-65>Carlson, ''Roughneck,'' pg. 65.</ref> 1899년 [[아이다호 주아이다호주]] [[코르덜레인 (아이다호 주아이다호주)|코르덜레인 시]]에서 임금 삭감으로 인해 분규가 일어났다([[1899년 코르덜레인 대치|코르덜레인 대치]]). 사측은 프락치를 심어 노조 조직가 및 친노조적 광부들을 색출해 해고해 버렸다. 좌절한 광부들이 폭력사태를 일으켰고 사람 두 명이 죽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ref name=carlson-54>Carlson, ''Roughneck,'' pg. 54.</ref> 7년 전에도 코르덜레인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고, 이번에도 군인들이 파업 분쇄에 나섰다. 군인들은 수백 명의 노조 조합원들을 어떠한 정식 기소도 없이 잡아다가 1년 동안 위생관리가 되지 않은 더럽고 벌레가 들끓는 창고에 가두었다. 창고 안에 그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으니 너무 바글바글해서 군인들은 유개화차를 가져다 입구를 막아야 했다.<ref>Carlson, ''Roughneck,'' pg. 55.</ref> 현지의 노조 지도자 한 명이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ref name=carlson-54 /> 헤이우드는 코르덜레인 시에서 경험한 악랄한 행위가 계급전쟁의 효시라고 생각했다. 1901년 WFM 대회에서 광부들은 “사회경제적 환경의 완전한 혁명”이 “노동계급의 유일한 구원”임에 동의했다.<ref>Elizabeth Jameson, ''All That Glitters: Class, Conflict, and Community in Cripple Creek.''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8; pg. 179.</ref>
 
1903–04년 WFM이 콜로라도 주에서 분규에 참여했을 때도 군병력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주방위군이 꺼내든 두 개의 선포문은 콜로라도 주지사의 호의로 광산업주들을 지원하는 군대와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노조측 변호인들이 법정에서 불법적으로 구금된 파업 참여자를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자 부관감 [[셔먼 벨]]이라는 자는 “[[인신보호청원]](Habeas corpus)은 집어치우라. 우리는 그들에게 [[검시|변사체 검시]](post mortems)밖에 줄 게 없다”고 당당히 말하기도 했다.<ref>Carlson, ''Roughneck,'' pg. 62.</ref> [[미국 헌법|헌법]]을 들먹이며 반박하자 벨의 부관 중 하나는 “헌법은 지옥에나 가라지. 우리는 헌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했다.<ref>Carlson, ''Roughneck,'' pg. 6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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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은 크리플크리크의 탄광(역시 파업이 일어난 바 있음) 관리자를 지낸 적이 있었다.<ref>Jameson, ''All That Glitters,'' pg. 140.</ref> 헤이우드가 보기엔 군인들이 고용주들의 편을 들어 일하는 것은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은 이미 누차 봐온 것이었다.<ref name=carlson-65 /> 그러나 콜로라도 주의회가 노조측의 불만사항을 인정하고 [[8시간 노동제]]를 통과시키자, 콜로라도 주대법원은 이것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ref>Carlson, ''Roughneck,'' pg.</ref> 그러자 WFM은 이 문제를 유권자들에게 들고 갔고, 주민투표 결과 72%가 찬성했다.<ref name=carlson-65 /> 그러나 콜로라도 주정부는 주민투표 결과를 무시했다.<ref name=carlson-65 />
 
정부가 사측을 편든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이제 조직된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8시간 노동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직접행동 뿐이었다. [[아이다호스프링스 (콜로라도 주콜로라도주)|아이다호스프링스 시]]와 [[텔류라이드|텔류라이드 읍]]의 광부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켰다가 자경단들의 총구에 포위당했고, 자신들이 터를 잡고 살던 지역사회에서 쫓겨났다. 법을 어긴 자경단원들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지만 그 영장이 실제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ref>Carlson, ''Roughneck,'' pp. 64–65.</ref>
 
헤이우드는 [[존 록펠러]]가 “콜로라도 민중들이 투표로서 행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골프채로 휘두름”에 분노했다.<ref>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174.</ref> 헤이우드가 보기에는 노사관계는 애초에 판 자체가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고, 그 판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노동자들은 어떠한 영속적 성취도 얻을 수 없었다. 자연히 헤이우드의 산별노조 사상은 점점 더 혁명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ref>Haywood, ''The Autobiography of Big Bill Haywood,'' pg. 181.</ref> 1905년 헤이우드는 극좌 사회주의자, 헤이마켓 전통의 노동무정부주의자, 여타 전투적 노동운동가들을 [[산업별 노동조합|혁명적 산별노조]] 사상 아래 묶기 위해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창설에 참여한다. 헤이우드는 산별노조 사상을 “작업복을 입은 사회주의”라고 불렀다.<ref name="Haywood,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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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우드의 사회주의 철학, [[직종별 노동조합]]보다 [[산업별 노동조합]]이 우월하다는 생각, 임금제도의 사악함, 기업·민병·정치인들에 대한 태도는 WFM 시절의 스승인 [[에드 보이스]]와 대부분의 요소를 공유한다. 보이스는 외국인 체류자의 고용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자고 주장한 적도 있다.<ref>William J. Gaboury. "From Statehouse to Bull Pen: Idaho Populism and the Coeur d'Alene Troubles of 1890s." ''Pacific Northwest Quarterly.'' January 1967, p. 1422.</ref> 그러나 이 점에서만은 헤이우드는 보이스와 달랐다. 보이스를 비롯한 많은 당대 노동 지도자들과 달리 헤이우드는 모든 인종을 초월해 노동자들이 같은 노조 아래 조직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IWW에 대한 헤이우드의 생각은 이랬다. “흑인과 백인을 모두 받아들일 정도로 크고, 모든 국가의 국적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크다. 국경선을 지워버릴 정도로 강한 조직이 될 것이다.”<ref name=orth>Quoted in Samuel Orth, [http://www.gutenberg.org/etext/3038 ''The Armies of Labor: A Chronicle of the Organized Wage-Earner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19.</ref>
 
1912년, 헤이우드는 [[루이지애나 주루이지애나주]]의 [[산림노동자 형제단]] 대회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당시 루이지애나에서는 서로 다른 인종끼리 만나는 것은 불법이었다.<ref name=zinn-337-339/> 헤이우드는 백인 노동자들이 흑인 노동자들을 대회 자리에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blockquote>{{인용문2|그대들은 같은 공장에서 함께 일합니다. 때로는 흑인 한 명과 백인 한 명이 나무 한 그루를 함께 베기도 합니다. 그대들은 지금 그대들이 노동하는 환경을 논하기 위해 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왜 이 문제에 대해 분별을 갖지 못하고 흑인들을 대회에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만일 그것이 불법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그 법을 어겨야 할 때인 것입니다.|<ref name=zinn-337-339/>}}</blockqu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