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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mbat deuxième croisade.jpg|thumb섬네일|350px|[[제2차 십자군]]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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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llang|en|Crusade|크루세이드}})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종교전쟁]]들이다. 좁은 의미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면 [[성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레반트|지중해 동해안]] 지역에서 진행된 전쟁들을 가리키나, 넓은 의미에서 중세의 기독교회에서 주동한 다른 전쟁들을 십자군 전쟁으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이교 (종교)|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가톨릭 집단 내부의 분쟁, 정치적 이득 등 전쟁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760년경을 전후하여 처음 사용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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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동해안 십자군 ==
=== 배경 ===
[[파일:Map of expansion of Caliphate.svg|thumb섬네일|upright=1.35|622년-750년 사이의 [[초기 무슬림 정복전쟁|무슬림 정복전쟁]] 판도.
{{범례|#a1584e|622년-632년 [[무함마드]] 당대}}
{{범례|#ef9070|632년-661년 [[정통 칼리파조]]}}
{{범례|#fad07d|661년-750년 [[우마이야 칼리파조]]}}]]
[[파일:Map Crusader states 1135-en.svg|thumb섬네일|upright=1.35|1145년 지중해 동해안 지도. 프랑크계 [[십자군 국가]]들([[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은 붉은 십자({{color|red|☩}})로 표시.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공국]]은 아르메니아인이 세운 십자군 국가이다. 서쪽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보인다. 이슬람권인 [[셀주크 제국]]과 [[파티마 칼리파조|파티마조 이집트]]는 녹색으로 표시되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였고, 632년 죽기 전까지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하나의 [[정체]]로 통일시켰다. 아랍인들은 7세기와 8세기를 거치며 군사 정복을 통해 급속히 팽창했다. 그들의 영향력 판도는 [[인도 아대륙]] 북서부와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남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피레네 산맥]]에 걸쳤다. 예루살렘은 637년 [[예루살렘 공방전 (636년-637년)|공성전]] 때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에게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ref>{{Harvnb| Wickham|2009|p=280}}</ref><ref>{{Harvnb|Lock|2006|p=4}}</ref><ref>{{Harvnb|Hindley|2004|p=1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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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목록|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소규모 용병부대 정도를 기대했던 것 같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의 재정과 권위를 다잡은 중흥군주였지만, 여전히 많은 외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나톨리아 지역을 급속히 식민하고 있는 튀르크족이 가장 골치였다.<ref>{{Harvnb|Asbridge|2012|p=34}}</ref> 같은 해에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는 이 안건을 논의하며 십자군 소집을 설교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우르바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군사적으로 도움으로써 얼마 전 갈라진 동서 교회를 재통합, 자신이 그 수장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ref>{{harvnb|Pierson|2009|p=103}}</ref>
 
[[파일:Peter the Hermit.jpg|thumb섬네일|left|제1차 십자군 당시 기사, 병사, 여자들을 이끄는 [[피에르 레르미트]].]]
클레르몽 공의회 직후 [[피에르 레르미트]]라는 자가 수천 명의 기독교도 빈민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것을 오늘날 흔히 [[군중 십자군]]이라고 부른다.<ref>{{Harvnb|Hindley|2004|pp=20–21}}</ref> 피에르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임박한 말세에 대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천국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ref>{{Harvnb|Slack|2013|pp=228–30}}</ref> 군중 십자군의 동기에는 빈민들의 [[구세주의]]가 강하게 깔려 있었으며,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만 하면 바로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ref name="Cohn 1970 61, 64">{{Harvnb|Cohn|1970|pp=61, 64}}</ref> 군중 십자군은 성지로 가는 길에 독일에서 유럽사 최초의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사태를 일으키는데, 이를 [[라인란트 학살]]이라고 한다.<ref>{{Harvnb|Slack|2013|pp=108–09}}</ref> [[스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 등지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행위가 일어났다. 이런 적대행위는 제한적 폭력에서 완전한 군사적 공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ref>{{Harvnb|Chazan|1996|p=60}}</ref> 군중 십자군은 동로마에 도착한 뒤 귀족들을 기다리라는 알렉시오스 1세의 충고를 무시하고 [[니케아]]로 쳐들어갔다가 튀르크족의 기습을 받고 대패, 불과 3천 명만 살아남았다([[키베토트 전투]]).<ref>{{Harvnb|Hindley|2004|p=2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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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집트는 [[수니파]] 칼리파인 [[아바스 왕조|아바스조]]에서 독립하여 969년부터 [[시아파]] 칼리파인 [[파티마 왕조|파티마조]]가 통치하고 있었다. 1121년부터 파티마조는 암살로 얼룩진 내부 분열의 수렁에 빠졌고 쇠퇴하기 시작했다.<ref>{{Harvnb|Asbridge|2012|pp=266–68}}</ref> 이에 [[예루살렘왕]] [[보두앵 3세 (예루살렘)|보두앵 3세]]는 이집트를 침공하려 했으나 이집트 측에서 160,000 황금[[디나르]]를 바치면서 계획을 중지했다. 1163년, [[비지어]](칼리파 밑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재상) 자리에서 쫓겨난 [[샤와르]]가 장기의 아들인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딘]]을 방문하여 정치적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누르 앗딘의 지원이 십자군의 움직임을 예견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누르 앗딘은 십자군이 나일 강 유역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할 것이 자명해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르 앗딘은 쿠르드인 장군 [[시르쿠]]를 이집트로 파병하여 파티마조를 뒤집어 엎고 샤와르를 비지어에 복직시켰다. 그러자 샤와르는 독립을 선언하고 보두앵 3세의 동생이자 그 후계 예루살렘왕인 [[아모리 1세]]와 동맹했다. 그러다 아모리가 동맹을 파기하고 가열찬 공격을 가해오자 샤와르는 다시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누르 앗딘은 시르쿠를 두 번째로 파병했고, 아모리는 퇴각했다. 하지만 시리아군은 한 번 배신했던 샤와르를 잡아 죽였고, 시르쿠가 비지어로 임명되었다. 2개월 뒤 시르쿠는 사망하고 그 조카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가 비지어를 계승했다. 유수프는 "정의와 신념"이라는 뜻의 별명 [[살라딘|살라흐 앗딘]]으로 더욱 유명해졌다.<ref>{{Harvnb|Asbridge|2012|pp=272–75}}</ref> 누르 앗딘은 1174년 사망했다. 누르 앗딘은 십자군 시대에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모두 손에 넣어 시리아를 통일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당대 무슬림들은 장기로부터 누르 앗딘을 이어 살라흐 앗딘으로까지 이어지는 무슬림 세력의 부활이라는 관념을 지지했지만, 그 과정은 말처럼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살라흐 앗딘은 칼리파의 모든 후계자들을 감금했다. 대개 이럴 경우 이전 왕조의 대를 끊기 위해 모조리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선에서 살려 주었다. 상전 누르 앗딘이 죽고 권력을 장악한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에서 자치 정권을 수립해 할거하느냐, 동지중해 세계 제일의 무슬림이 되느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했다.<ref>{{Harvnb|Asbridge|2012|pp=282–86}}</ref>
 
[[파일:Philippe Auguste arrivant en Palestine.jpg|left|upright=1.35|thumb섬네일|[[필리프 2세]]가 동지중해에 도착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누르 앗딘이 죽으면서 그의 영토들은 분할되었다. 살라흐 앗딘은 바그다드의 아바스조 칼리파와 누르 앗딘의 아들 [[아스살리흐 이슬라미 알말리크]]에게 동시에 신종하면서, 수니파의 보호자의 위치를 점했다.<ref>{{Harvnb|Asbridge|2012|pp=287–88}}</ref> 살라흐 앗딘은 전성기에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알레포는 장악하지 못했다.<ref>{{Harvnb|Asbridge|2012|p=292}}</ref> 예루살렘 왕국 측의 공격 계획에 대처하기 위한 수비군을 조직했지만, 살라흐 앗딘의 라틴 십자군과의 첫 교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나친 자신감과 전술적 착오로 인해 살라흐 앗딘은 [[몽기사르 전투]]에서 패배했다.<ref>{{Harvnb|Asbridge|2012|pp=307–08}}</ref> 그러나 이 한 차례의 차질에도 불구하고 살라흐 앗딘은 십수 년에 걸친 정치, 강압, 저수준 군사행동을 통해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했다.<ref>{{Harvnb|Asbridge|2012|p=322}}</ref> 1186년 생명이 위중할 정도의 병을 겪고 난 뒤, 살라흐 앗딘은 이슬람 측의 [[대전사]]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라틴 십자군에 대한 전역을 개시했다.<ref>{{Harvnb|Asbridge|2012|pp=333–36}}</ref> 당시 예루살렘왕 [[기 드 뤼지냥|기]]는 예루살렘 왕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을 동원하여 야전에서 영격에 나섰지만, 살라흐 앗딘은 기의 부대를 수자원 보급이 불가능한 사막 속으로 끌어들인 뒤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섬멸했다([[하틴 전투]]). 살라흐 앗딘은 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평화롭게 살던지, 아니면 40일 안에 퇴거하던지의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이 살라흐 앗딘의 수중에 떨어졌고, 왕도 예루살렘마저 [[예루살렘 공방전 (1187년)|5일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되었다.<ref>{{Harvnb|Asbridge|2012|pp=343–57}}</ref> [[아바스 베네딕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3세]]가 그 소식을 듣고 침통한 나머지 1187년 10월 19일 홧병으로 선종했다고 한다.<ref>{{Harvnb|Asbridge|2012|p=367}}</ref>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소집하는 [[아우디타 트레멘디]] 칙서를 발표,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한편 1189년 8월 28일 성지에서는 기가 거점도시 [[아크레]]를 포위했다가 살라흐 앗딘에게 역포위를 당하면서 [[아크레 공방전 (1189년-1191년)|2년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ref name="Asbridge 2012 686">{{Harvnb|Asbridge|2012|p=686}}</ref><ref>{{Harvnb|Asbridge|2012|pp=398–405}}</ref> 양군 모두 바다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오랫동안 [[스테일메이트]] 상태가 지속되었고, 십자군 측은 [[인육]]을 먹었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ref>{{Harvnb|Asbridge|2012|p=42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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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
[[파일:ConquestOfConstantinopleByTheCrusadersIn1204.jpg|thumb섬네일|1204년 동로마의 제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204년)|함락시키는]] 십자군.]]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의 소집을 개시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십자군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도 호응이 있었다.<ref>{{Harvnb|Tyerman |2006|pp=502–08}}</ref>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자신들의 세속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다. 단돌로의 목적은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해양력 확장이었고, 필리프는 자기 조카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와 매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동로마 황제로 복위시키고자 했다. 이 목적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임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알렉시오스 4세의 친삼촌)를 폐위시켜야 했다.<ref name="Davies 1997 359–360">{{Harvnb|Davies|1997|pp=359–60}}</ref> 베네치아에 도달한 기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을 해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인 [[자다르]]를 공성했다. 식겁한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을 즉각 [[파문]]했다.<ref name="Lock 2006 158–159">{{Harvnb|Lock|2006|pp=158–59}}</ref> 이 파문은 나중에 철회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면서 원정의 본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그 뒤 일단 물러갔다가 두 번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이번에는 도시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1204년)|약탈]]하여 교회를 분탕질하고 시민들 다수를 학살했다. 제4차 십자군은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1,000 마일 떨어진 위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ref>{{Harvnb|Asbridge |2012|p=530}}</ref>
 
13세기는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 결과 1212년의 [[어린이 십자군]] 같은 사건도 일어났다. 청소년 및 소년들 여러 무리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른들은 실패했던 성지 탈환이 자신들의 순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동지중해까지 도달한 어린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사건들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매우 희박하지만, 당시 천명된 대의에 대하여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시사해주는 지표가 된다.<ref>{{Harvnb|Asbridge|2012|pp=533–35}}</ref>
 
[[파일:Friedrich II. mit Sultan al-Kamil.jpg|thumb섬네일|left|알카밀(우측)을 만나는 프리드리히 2세(좌측). [[조반니 빌라니]]의 《[[신연대기]]》 삽화.]]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집트-시리아 일대의 살라흐 앗딘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5차 십자군]]이다. 지휘관은 [[헝가리왕]]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 폰 외스터라이히 공작|레오폴트 4세]]였고,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에서 모집되었다. 레오폴트와 [[장 드 브리엔]]이 [[다미에타]]를 공격해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간 병력은 격퇴당하여 항복했다.<ref>{{Harvnb|Lock|2006|pp=168–69}}</ref><ref>{{Harvnb|Riley-Smith|2005|pp=179–80}}</ref> 다미에타는 무슬림들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ref>{{Harvnb|Hindley|2004|pp=561–62}}</ref>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조약을 파기하여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원래는 십자군을 지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 (예루살렘)|이사벨 2세]]와 결혼했기에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할 수 있었고, 1228년 아크레에 도착했다. 무슬림들에게서 탈환된지 얼마 안 된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는 기독교 군주들 중 무슬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무슬림 근위병을 두고 심지어 [[하렘]]도 가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적 수완에 힘입어, [[제6차 십자군]]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협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ref>{{Harvnb|Asbridge|2012|pp=566–71}}</ref> 예루살렘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에서 아크레로 이어지는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들에게 넘기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들이 계속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술탄]] [[알카밀]]과 동맹도 맺었다. 이런 조약을 맺는 것은 프리드리히가 이 일대 지역에 어떠한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케 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자기 직할령이 공격받자 프리드리히는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ref>{{Harvnb|Asbridge|2012|p=569}}</ref>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세속 제후들이 종종 원정을 벌였다. 1239년의 [[남작 십자군]]은 [[나바라왕]] [[티발트 1세]]와 [[제1대 콘월 백작 리처드|콘월 백작 리처드]]가 이끌었다. 이 십자군은 무력 외교와 아이유브조의 여러 파벌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음모 공작을 병행 실시했다.<ref>{{Harvnb|Asbridge|2012|p=573}}</ref> 이 때가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였다. 하지만 그 중흥은 어디까지나 알카밀이 죽고 아이유브조가 분열되어 약화된 것에 기인했기에 사상누각과 같았다.<ref>{{Harvnb|Asbridge|2012|p=57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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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말의 동지중해의 정치 판도는 여러 세력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복잡했다. 바이바르스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기독교도들과 몽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고, 두 번째는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부터 [[노예]]를 수급해 오는 교역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여 바이바르스는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와 외교를 맺고 만프레디가 교황청 및 [[샤를 1세 당주 백작]](루이 9세의 동생)과 대립하는 것을 도왔다.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되었고, 여러 세력이 영향력을 발휘하려 경쟁했다. 한편, [[삽바스 전쟁]]의 결과 경쟁 [[해상공화국]] 제노바로부터 아크레에서 티레에 이르는 영토를 빼앗은 베네치아는 바이바르스의 이집트와 기꺼이 무역했다. 바이바르스는 그러는 동시에 [[니카이아 제국|니카이아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하여 제노바인들의 자유로운 통행도 보장했다.<ref>{{harvnb|Asbridge|2012|pp=628–30}}</ref>
 
[[파일:SiegeOfAcre1291BNF.JPG|thumb섬네일|right|1291년 [[아크레 공방전 (1291년)|아크레가 함락]]되었고, 아크레의 기독교도 시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당주가 비슷하게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샤를은 [[시칠리아]]와 비잔티움의 영토를 탈취하는 한편, 딸들을 라틴계 비잔티움 제위 요구자들에게 시집 보냈다. 1270년, 샤를의 형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예루살렘 왕위를 노리던 샤를은 형을 설득해서 예루살렘이 아닌 [[튀니스]]의 아랍 반군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루이의 십자군은 풍토병으로 초토화되었고 루이 본인도 8월 25일 튀니스에서 죽었다.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를 비롯한 소규모 수행단만 계속 남아 싸웠는데, 이것을 [[제9차 십자군]]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할 뻔한 뒤 10년짜리 휴전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로써 동지중해 지역에서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ref>{{Harvnb|Asbridge|2012|pp=643–44}}</ref> 1281년 교황 선거 결과 프랑스인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의 모든 권력이 샤를 당주를 뒷받침하는 형국이 되었다. 샤를은 과거 제4차 십자군이 그랬던 것처럼 동로마 황제위를 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십자군을 일으키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배후 조종에 의해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대적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으로 샤를 당주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고, [[아라곤왕]] [[페로 3세]]가 시칠리아왕을 칭했다. 마르티노 4세는 페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을 토벌하는 [[아라곤 십자군]]을 소집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285년, 지중해 제국을 만들고자 평생을 바친 샤를 당주가 그 모든 노력이 무상하게 사망했다. 루이와 샤를 형제는 자신들을 교황청을 옹위하는 신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다.<ref>{{Harvnb|Runciman|1958|p=8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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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비 십자군 ===
[[파일:Albigensian Crusade 01.jpg|thumb섬네일|upright=1.35|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알비파(왼쪽 사람들)를 파문하고, 십자군이 알비파를 학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은 알비파라고도 하는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한 십자군이다.<ref>{{Harvnb|Riley-Smith|1999|p=4}}</ref> 카타리파는 [[프랑스]] 남부에서 상당한 교세를 모으고 있었다. 십자군에게 카타리파는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교세 중심지였던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위의 유일한 추정상속인 [[잔 드 툴루즈 여백작|잔]]이 [[루이 9세]]의 남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과 결혼했고, 잔과 알퐁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못한 채 잔이 죽자 툴루즈 백국은 [[카페 왕조]]의 직할령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프랑스왕 입장에서 알비 십자군의 실제 동기 중 하나였으리라 짐작된다.<ref>{{Harvnb|Lock|2006|pp=163–6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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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콩키스타 ===
[[파일:La Rendición de Granada - Pradilla.jpg|thumb섬네일|1492년 [[그라나다 조약 (1491년)|그라나다의 항복]].]]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이베리아 기사단이 이합집산하여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산티아고 기사단]]을 형성했고, 이들을 돕는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1212년에서 1265년 사이에 [[무어인]], [[무와히드 칼리파조|무와히드조]] 등 무슬림 세력을 크게 몰아냈고, 교황이 승인한 이베리아 십자군들의 도움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라나다 토후국]]은 1492년까지 존속했지만, 그라나다마저 멸망한 이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된다.<ref>{{Harvnb|Lock|2006|p=211}}</ref>
 
== 14, 15, 16세기 ==
=== 대 오스만 십자군 ===
[[파일:NikopolisSchlacht.jpg|thumb섬네일|[[니코폴리스 전투]].]]
 
소규모 십자군 시도들이 있던 14세기를 거쳐, 14-15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발칸 반도 정복]]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십자군이 이루어지게 된다. 1309년, 잉글랜드, 프랑스 북동부, 독일에서 30,000 여명의 농민들이 모였으나 [[아비뇽]]까지 가서 거기서 해산했다.<ref>{{Harvnb|Lock|2006|pp=187–88}}</ref> 1365년, 키프로스왕 [[피에르 1세 드 뤼지냥]]이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는데, 이를 [[알렉산드리아 십자군]]이라고 한다. 피에르 1세의 동기는 종교적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만큼 경제적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ref>{{Harvnb|Lock|2006|pp=195–96}}</ref> 1390년에는 [[루이 2세 드 부르봉 공작]]이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을 적으로 삼은 [[바르바리 십자군]]을 지휘했다. 하지만 10주간의 공방전 끝에 십자군은 10년 기한의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ref>{{Harvnb|Lock|2006|p=19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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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스 십자군 ===
[[파일:Hussitenkriege.tif|thumb섬네일|upright|1431년 [[도마츨리체 전투]]에서 십자군을 박살내는 후스파 군세.]]
[[후스 전쟁]]이라고도 하는 후스 십자군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진행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토벌하려 한 십자군이다. 후스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15세기 초에 총 다섯 차례(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1431년)의 대 후스파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로 교리 차이로 반목하던 후스파의 내부 종파들이 단결하여 침략자 십자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스 전쟁은 1436년 끝났지만 천주교회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천주교회는 [[타보르파|급진 후스파]]를 제거하기 위해 온건 후스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교리를 용인해주는 [[바젤 협정]]을 맺어야 했다.<ref>{{Harvnb|Lock|2006|pp=201–02}}</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