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침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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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국의 군사력 ==
[[파일:Second world war europe 1939 map de.png|right|300px|thumb섬네일|'''1939년 시점의 유럽의 정세'''. 폴란드는 [[독일]]·[[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 동맹군(짙은 청색)과 [[소련]]군(짙은 녹색)에게 동서 양쪽에서 침공을 받았다.]]
 
=== 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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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제2공화국 ===
[[파일:7TP.jpg|thumb섬네일|right|220px|폴란드 육군 [[7TP]][[경전차]]]]
 
[[파일:Blyskawica l d.jpg|thumb섬네일|right|220px|[[그디니아]] 항에 계류되어 박물관이 된 [[폴란드 제2공화국]] 해군 [[구축함]] “[[브위스카비차]]”(''ORP Błyskawica'')]]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쳐 폴란드는 국토의 중서부에서 남부에 걸쳐 넓은 중앙 산업 지대(Centralny Okręg Przemysłowy)에 대규모 산업 투자를 실시했다. 다가올 독일과의 방위 전쟁 준비가 수년에 걸쳐 실시되었으나, 전쟁 개시는 빠르더라도 [[1942년]] 이후라고 예상했기에 공업화 계획도 그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폴란드 제2공화국]] 자국의 공업화 자금 조달을 위해 근대 기기의 대부분을 생산 수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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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제2공화국 공군]](Wojska Lotnicze i Obrony Powietrznej, 통칭 Siły Powietrzne)은 독일 공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했으나, 일반에게 오해받은 것으로 알려진, 날아오르기 전에 지상에서 전멸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출처|날짜=2008-3-1}}. 폴란드 공군에게는 최신식 전투기가 배치되지 않았으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훈련을 받은 조종사들이 있었고, 수적이나 질적으로도 유리한 독일 공군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는 전투용 군용기가 겨우 1,145대 정도에 불과했다. 그중에 전투기는 945대였다. 기타 200대의 정찰기 및 폭격기가 있었다. 전투기중에서 가장 근대적 이었던건 Pzl P.24였으나, 이마저도 구식이었다. 전투용 군용기 중 근대적인 기종인 [[PZL 37오시 폭격기]]는 겨우 125대뿐이었고, 그밖에 다른 독일군 비행기에 비해 압도적으로 구식이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 해군]](Marynarka Wojenna)은 [[구축함]]과 [[잠수함]]과 [[중순양함]] 및 소형의 호위함으로 구성된 소규모였다. 구축함 3척은 8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독일군을 회피하여 북해로 나가 [[영국 해군]]에 합류하는 [[펠킹 작전]]에 따랐다. 잠수함대는 [[주머니 작전]]에 참가했다. 이것은 발트 해에 있던 독일의 해상 보급선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었으나 커다란 성공을 얻지는 못했다. 폴란드 상선대는 영국과 합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여러 상선대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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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주요 관심사는 [[국제 연맹]]이 관리하는 독일인 거주 자유 도시 [[그단스크|단치히]]의 존재와 [[폴란드 회랑]]이라 불리는 [[발트 해]]로 이어진 폴란드령에 의해 독일 본토와 단절된 [[동프로이센]]의 존재였다. 독일에게 자유 도시 단치히는 돌려받아야 할 존재였다. 그것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여 빼앗긴 영토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단치히의 독일계 주민의 해방을 주장하며 [[민족주의]]를 부추겼다. [[1939년]] 초기 히틀러는 '''군사력에 의한 폴란드 문제 해결'''을 준비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리고, 이어서 독일 정부는 자유 도시 단치히의 독일 병합 요구와 폴란드 회랑을 통과해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연결하는 [[치외법권]] 도로 건설 요구를 강하게 주장했다. 폴란드 침공 계획은 [[4월 3일]]까지 준비가 진행되었다.
[[파일:Rzeczpospolita 1922.png|thumb섬네일|right|260px|[[1920년]] [[국경|국경선]]을 표시한 지도. [[독일 제국]]령은 짙은 갈색으로, [[폴란드]]령은 황색으로 표시했다. 폴란드령 중에 서북단의 [[발트 해]]에 인접한 가느다란 부분을 [[폴란드 회랑]]이라고 부른다.]]
 
히틀러는 폴란드가 독일의 요구에 대해 양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폴란드 정부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다. 독일의 확장주의에 위기감을 갖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3월 30일]] 폴란드에 대해 군사 원조를 보증하고 폴란드 정부의 방침을 지지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다가올 폴란드와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월 28일]] 독일은 [[1934년]]에 체결했던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과 [[1935년]]에 체결한 [[런던 해군 군수 조약]]을 모두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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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러나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크]] 대령이 [[체임벌린]] 및 핼리팩스 경과 회담한 후 변경되었다. [[1939년]] [[8월 25일]] 프랑스-폴란드 사이에서 군사 동맹을 보완하는 것으로 폴란드-영국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으로 영국은 폴란드의 독립을 지키는 의무를 떠안게 되었다.
 
[[파일:MolotovRibbentropStalin.jpg|250px|right|thumb섬네일|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독소 불가침 조약]]에 서명. 몰로토프 뒤에 서있는 사람 중 왼쪽이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오른쪽이 소련 수상 [[이오시프 스탈린]].]]
한편 [[모스크바]]에서는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비밀 회담이 진행되어, [[8월 22일]]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히틀러는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더라도 소련이 이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시했다. 또한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따르면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 분할 점령(서쪽의 ⅓은 독일, 동쪽의 ⅔는 소비에트 연방이 점령)에 합의했다. 이 정보는, 연합국 측 동맹국의 첩보 기관에서 비밀 의정서 내용을 밝혀냈으나, 폴란드 정부와는 공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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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과정 ==
=== 독일의 계획 ===
[[파일:Dywizje wrzesien 1.png|thumb섬네일|260px|right|[[1939년]] [[9월 1일]] 시점에서의 독일군과 폴란드군의 배치]]
침공 작전은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가 기안하여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가 지휘하였다. 군사 공격은 선전 포고에 앞서 개시되었고, 근대적인 항공 전력과 전차 부대를 사용한 전통적인 [[섬멸전|섬멸전 이론]]에 의거한 것이었다. 보병은 전부 자동차화되지는 않았으나, 자주포 부대와 병참 부대를 유지하고 전차 부대에게 지원받아 트럭에 탑승한 보병(장갑 척탄병의 전신)은 적전선에 집중한 침공 부대의 신속한 이동을 도와 고립된 적 부대를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군 운송의 주력은 차량과 기병, 그리고 독일군 보병의 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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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군사 행동은 선전 포고가 있은 뒤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40분에 개시되어, 독일 공군이 폴란드의 도시 비엘룬을 기습 공격하고, 폭격으로 도시의 75%를 파괴, 약 1,200명의 시민을 살해했다. 5분 뒤 오전 4시 45분 구식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발트 해에 인접한 자유 도시 단치히 근교에 폴란드의 [[비지]](飛地)라 불린 베스테르플라테의 요새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같은 날 독일 공군이 폴란드의 각 도시를 폭격하는 것과 더불어 독일 육군이 폴란드 국경의 3방면에서 일제 진격을 개시했다.
[[파일:Smialy wagon altyleryjski.jpg|thumb섬네일|right|260px|[[1939년]] 9월의 독일군과의 전투에 사용된 [[폴란드 육군]]의 [[장갑 열차]] No.11 “[[다느타]]”호. [[9월 1일]]의 [[모크라]]에서의 전투에 참가한 No.53 “[[시먀위 (장갑 열차)|시먀위]]”호와 같은 형.]]
오전 8시에는 그 몇 시간 전부터 이루어진 독일 공군의 급강하 폭격으로 지원받은 독일 육군 남부 집단군에 속한 2개 기갑 사단 및 1개 보병 사단이 폴란드령 실레지아의 도시 모크라 근교에서 지상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폴란드군 1개 기병 여단(보빈 기병 여단), 1개 보병 사단의 몇몇 부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도착한 1대의 장갑 열차 No.53 [[시먀위]]에 의해 그 날 격퇴되었다. 독일군 주력은 폴란드 서부 국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공격로로 진격했다. 제2의 공격로는 북쪽의 동프로이센에서 진군하였고, 남쪽의 슬로바키아에서는 제3의 공격로로서 독일군과 슬로바키아인 부대 베르노라크군이 진군했다. 이들 모든 침공군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최종 목표로 하고 있었다.
[[파일:Mokra.jpg|thumb섬네일|left|260px|[[모크라]] 마을에 있는 [[볼리니|보빈]] [[기병]] [[여단]]의 기동 현황. 보빈 기병 여단은 [[우치]]군에 속한다.]]
폴란드의 서방 동맹국 정부는 9월 3일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폴란드에 대한 구체적인 원조를 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거의 모든 전력(특히 기갑 부대는 85%, 항공 부대는 60%가 집중되었다.)이 폴란드 공격에 나섰지만 프랑스는 독일을 공격하지 않았기에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은 조용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가짜 전쟁]](영어:phony war, 프랑스어:Drôle de Guerre, 폴란드어:Dziwna wojna, 독일어:Sitzkrieg)라고 불렀다. 만일 이 시기에 영국군과 프랑스 군이 곧바로 독일 서쪽을 공격했다면, 전쟁은 조기에 독일의 패배로 끝났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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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독일군은 비스와 강 서쪽의 폴란드군에 대해 포위망을 좁혀 동부로의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 최초 몇 시간에 맹렬한 폭격을 받은 바르샤바 시는 [[9월 9일]]에 독일 지상군 부대의 최초 공격을 받았고, [[9월 13일]]에는 포위 공격을 받았다. 그 때쯤 독일군의 최전선 부대는 동폴란드의 중심 도시였던 르부프(리보프) 시까지 도달했다. [[9월 24일]]에는 1,150대의 독일 비행기가 바르샤바 시가지를 공격했다.
[[파일:Poland2.jpg|thumb섬네일|right|260px|[[9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의 전투 경과. 독일군이 [[섬멸전 이론]](''Vernichtungsgedanke'')에 의거해 진격하고 있다.]]
'''폴란드 침공 9월 작전에 벌어진 최대의 전투'''인 [[브주라 전투]]는 바르샤바 서쪽에 있던 브주라 강 부근에서 9월 9일부터 9월 18일에 걸쳐 벌어졌다. 이 8일간의 격전에서 [[폴란드 회랑]]에서 후퇴한 포즈난 군단과 포모제(포메라니아) 군단이 진격하던 독일 제8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처음엔 폴란드 측이 우세했으나 물량에서 2배나 앞선 독일군이었기에 이 공격 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비록 독일군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히기는 했지만, 이 패배로 인해 폴란드군의 주도권은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고, 대규모 반격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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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국가 붕괴가 임박한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계 주민과 벨라루스계 주민의 보호”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의 “비밀 의정서”에 기록된 독일과 소련이 유럽을 양분한다는 것에 합의한 사실을 기초로 한 공동 침략 행위였다.<ref>[http://avalon.law.yale.edu/subject_menus/nazsov.asp Avalon Project - Nazi-Soviet Relations 1939-1941]</ref>
 
[[파일:Poland1939 after 14 Sep.jpg|thumb섬네일|right|260px|[[9월 14일]]부터의 전투 경과. 소련군은 [[9월 17일]]에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
약 25개 대대로 이루어진 폴란드 국경 방위대는 동부 국경 방위의 임무를 맡았으나, 소련의 대규모 침입을 막을 수 없었다. 리츠시미그위 원수는 국경 방위대에게 소련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도 약간의 소규모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로도노]] 전투에서는 병사뿐만 아니라 지역의 시민까지도 방어전에 참가했다. 소련군은 폴란드군 사령관 중 1명인 유제프 올쉬나 빌친스키 장군을 포함한 폴란드인 포로 및 민간인 다수를 살해했다. [[우크라이나]]인도 폴란드인에 대한 폭동을 일으켰고, 공산주의 게릴라가 각지의 반란을 조직해 예를 들어 스키델 마을에서는 이곳의 게릴라가 폴란드인에 대해 강도 및 살인을 저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