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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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고려 전쟁===
[[파일:Battle of Mt.Kongsan.jpg|thumb섬네일|right|250px|[[공산 전투]]에서<br>(공산성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우측에 선 이)과 [[고려 태조]] [[왕건]](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
궁예는 강력한 왕권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강한 왕권을 지향하던 궁예의 말에 순순히 따를리 만무했다. 궁예는 고구려계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청주 호족들을 이용하는 등 여러 왕권 강화정책을 펴가고, 왕권에 조금이라도 도전할 낌새가 보이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 때문에 신하들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그를 따르던 장군들마저 배반해 나라를 잃고 말았다. 궁예는 도망다니다가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 역사를 쓴 사람은 왕건이 세운 고려의 사람들이고, 또한 왕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것은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궁예의 궁궐이 있던 철원 근방에는 명성산(궁예가 왕건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키웠으나, 끝내 역부족인 것을 깨닫고 군대를 해산하자 부하들이 슬피 울었다. 그것을 따 명성산이라 한다. 울음산이라고도 한다.)등 궁예가 끝까지 저항하다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