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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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기 ====
[[파일:Yi Saek.jpg|thumb섬네일|[[이색]]]]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 곳은 [[영주]]와 [[양주]] [[삼각산]]이다. 정도전 아버지 정운경이 중앙으로 관직을 옮김에 따라 [[개성특급시|개경]]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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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과 소년기 ====
[[파일:Goryeo-Portrait of Jeong Mongju-02.jpg|thumb섬네일|left|140px|[[포은 정몽주]]와는 [[이색]]의 같은 문하이자 학문적 친구이고 동지였다가 이념의 차이로 인해 갈라져 그와 역적이 된다.]]
 
유년기 그는 가학과 풍기 진중길의 사위 최림을 통해 기초학문을 배우고, 개경으로 올라와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60년 진사시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색]]과 교류하면서 그는 성리학적 이념과 사상을 심층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맹자]]의 성선설과 역성혁명론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맹자의 성선설에는 다소 회의적인 견해를 품게 되었다.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로는 포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김구용 (고려)|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 [[설장수]](偰長壽), [[박상충]] 및 5년 연하의 [[이숭인]]과 [[하륜]], 10년 연하의 [[권근]] 등이 있었는데 모두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었다. 정도전은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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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
====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기 ====
[[공민왕]] 때인 [[1360년]]([[공민왕]] 9년) [[고려의 과거 제도|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관직]]에 나갔다. 그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1365년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 [[정운경]]과 어머니 [[홍주 홍씨|영주우씨]]가 1366년 1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당시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백일탈상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나, 그는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봉행 실천하였다. [[1369년]] 가을,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12월, 관직에 복귀하였다.
 
==== [[신돈]]의 죽음과 [[성균관]] 강학 ====
[[파일:Seonggyungwan quad2.jpg|thumb섬네일|150px|left|성균관 경내]]
 
1367년 [[성균관]]을 중영하고 그해 [[이색|목은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1370년]] 그는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등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포은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다시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1371년]] [[태상박사]]에 임명되고, 다시 [[예의]]정랑이 되어 [[태상박사]]를 겸임했다. 신돈의 무모한 전횡에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잠시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하였다가, [[신돈]]이 제거된 뒤에 정도전은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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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건국([[1392년]]) =====
{{참고|조선 건국|개국공신}}
[[파일:King Taejo Yi 01.jpg|thumb섬네일|200px|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ref name="소비자"/>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조선의 첫번째 임금으로 [[조선 태조|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및 성안 52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ref name="이성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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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천도([[1394년]] [[11월 21일]]) =====
[[파일:Gyeongbokgung Geunjeongjeon.jpg|thumb섬네일|left|200px|경복궁 근정전]]
[[파일:Seoul map 18c.jpg|thumb섬네일|right|180px|[[한성부]] 지도]]
 
{{참고|한양 천도|경복궁|덕수궁|창경궁|경희궁|사대문|사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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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 정벌 계획 ====
[[파일:Zhu Yuanzhang.gif|thumb섬네일|left|200px|[[명나라]]의 초대 황제 홍무제(주원장)]]
{{참고|요동 정벌}}
[[1392년]] 건국 직후부터 그는 [[요동 정벌]](1392)을 계획한다. 1396년 요동 정벌의 방안으로 그는 그때까지 각 지역의 왕실측근과 [[개국공신]]들이 사적으로 보유하던 [[사병]]을 모두 혁파하여 국가의 정규군으로 개편하자는 [[사병 혁파]]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사병]]을 중심으로 정변을 세우려고 계획한 [[이방원]]은 [[고려유신 그룹]]을 규합하여 노골적으로 반감을 품고 역습의 기회를 품게 되었다. 동시에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하기 위하여 [[명나라]]로 가는 사신 [[하륜]], [[설장수]] 등을 비롯한, 반감을 품은 인사들을 사주하여 은밀히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획책하려 한다고 밀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