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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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1~1855) ===
[[파일:Göttingen-Grave.of.Gauß.06.jpg|thumb섬네일|가우스의 묘]]
[[1855년]]에 독일 [[괴팅겐]]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괴팅겐의 알바니프리드호프(Albanifriedhof) 묘지에 묻혔고, 가우스의 사위 하인리히 에발트({{llang|de|Heinrich Ewald}})와 가우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볼프강 자르토리우스({{lang|de|Wolfgang Sartorius}})가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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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스는 변의 개수가 페르마 소수인 정다각형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가우스는 정수론을 수학의 중요한 분야로 만들었다. 가우스는 모든 자연수는 3개의 삼각수들로 나타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가우스는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과 함께 세계 3대 수학자들 중 한 명이 됐고, 오늘날에는 "수학의 왕자"라는 타이틀로 굉장히 유명하다.
=== 정수론 ===
[[파일:Disqvisitiones-800.jpg|thumb섬네일|가우스의 저서 《산술 연구》 표지]]
그의 저서 《산술 연구》({{llang|la|Disquisitiones Arithmeticae|디스퀴시티오네스 아리트메티카이}})는 일반적인 정수론의 용어에 있어서는 혁명적 개선이다. 정수의 나누어떨어지는 개념의 처리를 매우 단순화 시킨 [[합동 산술]]과 [[합동식]] 등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1보다 큰 모든 자연수는 소인수들의 순서를 무시하면 유일한 방법으로 소인수 분해된다는 [[산술의 기본 정리]]를 최초로 증명했고,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장 르 롱 달랑베르]]에 의해서 발표되었지만 엄격하게 증명되지 못했던 [[이차 상호 법칙]]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포함하고 있는 가우스의 《산술 연구》는 정수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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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 23세였던 가우스는 그 문제에 관해서 직접 듣고 달려들었다. 석 달동안 집중해서 작업을 한 뒤에, 그는 세레스의 최초 발견으로부터 약 1년 뒤인 1801년 12월의 위치를 예측했고, 이 예측은 0.5도 내에서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그는 또한 [[18세기]]의 궤도 예측에 대한 그 성가신 수학을 합리화했다. 《천체 운동론》으로 몇 년 뒤에 출판된 그의 업적은 천문학적인 계산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가우스 인력상수]]를 제시했고, 오늘날에는 측정 오차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모든 과학에 사용되는 최소제곱법을 포함하고 있었다. 1809년에 가우스는 정규 분포 오차 가정하에 그 방법을 증명할 수 있었다. 최소제곱법은 [[1805년]]에 이미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발표하였지만, 가우스의 편지들과 사후에 발견된 논문들을 통해서 가우스가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파일:Bendixen - Carl Friedrich Gauß, 1828.jpg|thumb섬네일|《천문학 소식지》({{llang|de|Astronomische Nachrichten}})에 실린 가우스의 초상화(1828년)]]
 
=== 측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