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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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바하|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바하 (도시)}}
[[파일:Bach.jpg|thumb섬네일|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초상화]]
[[파일:Johann Sebastian Bach signature.svg|right|200px|alt=Signature of J. S. Bach]]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llang|de|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31일]]<ref>{{웹 인용|제목=Spring equinox, Bach's birthday fall on March 21, but he wasn't born anywhere close to the equinox|url=http://archive.is/XBDuX|출판사=mlive.com/music|확인날짜=2017-03-21||언어=영어}}</ref>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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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파일:Johann Nikolaus Forkel.jpg|thumb섬네일|right|바흐를 최초로 재발굴하고 최초의 연구서를 펴낸 독일의 음악사학자 요한 포르켈(1749-1818)]]
 
== 일생 ==
=== 유년 시절(1685–1703) ===
[[파일:Johann Ambrosius Bach.jpg|thumb섬네일|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 바흐의 아버지]]
[[1685년]] 거리의 악사(바이올린 주자)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1695)의 막내아들로서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3월 23일]]에 그 곳의 성(聖)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출생한 것은 3월 21일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르돌프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hm, 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23-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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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ref>F. M. SCHERER, The Evolution of Free-Lance Music Composition, 1650–1900, Journal of Cultural Economics 25: 307–319, 2001</ref>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파일:포르켈 - 바흐의 생애와 예술, 작품.jpg|thumb섬네일|독일의 음악사학자 요한 포르켈의 저서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 이 작품은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를 최초로 발굴한 연구서로 바흐 사후 재평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ref>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ref>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