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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유학과 대학 재학 시절 =====
[[파일:신익희1945.gif|thumb섬네일|180픽셀|right|대학교 동창이자 정치적 동지 해공 [[신익희]]]]
[[파일:Okuma lecture hall Waseda University 2007-01.jpg|thumb섬네일|left|180px|모교 와세다 대학교]]
 
일본에서는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으며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의 [[문학]] 강의록과 정경과강의록으로 독학을 하였으며, [[1912년]] [[가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3년]]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를 수료하고,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 그는 [[신익희]](申翼熙), [[김성수 (1891년)|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만났다. 이들은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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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
===== 체포와 투옥 =====
[[파일:Imperial Hotel TOKYO 2007.jpg|thumb섬네일|200px|일본 제국호텔. 그가 1919년 말 여운형을 따라 일본을 방문했을 때 숙박하던 곳이다.]]
[[파일:Yeounhyung.jpg|thumb섬네일|160px|[[여운형]]. 전남 하의도에 감금된 장덕수의 탈출을 도왔다.]]
 
[[1919년]] [[2월]] 비밀리에 귀국하려 했으나, 귀국 직후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荷衣島)에 거주제한을 당했다. 오사카에서 살인을 하고 조선으로 도주한 기무라 겐지를 찾기 위해 조선에 잠입해서 수사중이던 일본 경찰에게 우연히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진술을 거부하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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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 =====
[[파일:Kim seong soo 1914.jpg|thumb섬네일|left|160px|오랜 친구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 (1914년 무렵)]]
 
{{참고|사회주의|동아일보|조선교육회|브나로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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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
[[파일:Changdeoksu 1920s.PNG|thumb섬네일|left|140px|[[1920년]]대의 장덕수]]
[[파일:장덕수 02.jpg|thumb섬네일|right|150px|설산 장덕수]]
[[1921년]] [[5월]]에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대회를 열고 국내 대표를 초청했는데,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이때 참석한 이봉수(李鳳洙)를 통해 국내에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자금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달되지 않고<ref name="choi055">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민음사, 2005) 55페이지</ref>, 그가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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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유학 ====
===== 유학과 도미 독립운동 =====
[[파일:Dong a ilbo 19200401.jpg|thumb섬네일|right|210px|동아일보 창간호]]
{{참고|컬럼비아 대학교|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1923년]] 4월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13년간 미국에서 체류했다.<ref>이후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특별 배려로 그는 귀국할 때까지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의 직위를 유지한다.</ref> [[1923년]]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 신문학과에 입학해 수학하였고, [[1924년]] 오리건 주립대학에서 신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뉴욕으로 건너가 [[1924년]] 10월부터 [[1936년]]까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수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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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에서 보내주는 특별 월급 외에도 그는 사탕수수 농장에 취직하여 노동과, 식당, 상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조달한다.
 
[[파일:Chang sihn song.PNG|thumb섬네일|left|150px|[[1936년]] [[영국]] [[런던]]에서<br />(좌측 [[김성수 (1891년)|김성수]], 두 번째 [[이활]], 우측 첫 번째 장덕수, 두 번째 [[신성모]])]]
 
유학 직후 그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한국인 유학생 친목단체에 조직에 참여, 북미한국인유학생총회의 부회장에 선출된다. 유학생활 하는동안 그는 [[허정]], [[이기붕]], [[조병옥]] 등을 만나 사귀었고,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서재필]] 등과도 만났다. [[1925년]] [[이승만]]등이 조직한 [[대한인 동지회|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 뒤 그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임정 구미위원부]]에 수시로 출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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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 연구 활동과 박사 학위 취득 =====
[[파일:Chang Deoksu1936.PNG|thumb섬네일|left|130px|[[1936년]] 박사 과정 재학 중]]
 
대학원 재학시절 1929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다. 런던에서는 [[윤보선]], [[윤치왕]] 등을 다시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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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장기 말소 사건 =====
[[파일: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jpg|썸네일|180px|right|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 말소 사건']]
[[파일:난석 박은혜.jpg|thumb섬네일|left|200px|1930년대 후반의 [[박은혜 (1904년)|박은혜]]]]
{{참고|일장기 말소 사건}}
이어 귀국하여 [[1936년]] [[동아일보]] 부사장을 지냈으나,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부사장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김활란]]에게 구혼을 거절당한 뒤 그는 [[박은혜 (정치인)|박은혜]](朴恩惠)와 교제하다가 청혼, [[1937년]]에 그녀와 재혼하였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한국인]] [[손기정]]이 [[아르헨티나]]의 사발라(Zabala) 선수를 꺾고 우승하였다. [[9월]] [[동아일보]]의 기자 이길용은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을 보도할때 [[일장기]]를 삭제한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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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후반 =====
[[파일:장덕수.JPG|썸네일|왼쪽|170픽셀|장덕수]]
[[파일:김성수와 장덕수.jpg|thumb섬네일|right|160px|친구 [[김성수 (1891년)|김성수]]와 함께]]
 
[[1940년]]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을 거절한다. 총독부는 그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하여 불이익을 주거나 처벌하지는 않았다. 장덕수가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는가 여부도 불투명하다.{{출처|날짜=2011-8-19}} 또한 장덕수는 송진우와 함께 여러 번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오가며 [[동아일보]] 폐간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한 바도 있었다. 이후 그는 [[보성전문학교]]의 [[철학]], [[사회과학]] 교수로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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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후 활동 ===
==== 한민당 창당, 언론 활동 ====
[[파일:Jangdeoksu 1945.jpg|thumb섬네일|right|200px|만년의 장덕수]]
[[파일:송진우.gif|thumb섬네일|right|150px|친구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참고|한국민주당|건국준비위원회|국민대회준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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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공동위원회 찬성 ====
[[파일:Seoul-Deoksugung-10.jpg|thumb섬네일|150px|left|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
{{참고|미소공동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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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와의 갈등, 피살 ====
[[파일:김구 재판정 출두 장면.jpg|thumb섬네일|left|150px|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
[[파일:Kim Gu (1947).jpg|thumb섬네일|right|130px|김구]]
 
장덕수는 [[한민당]]의 정치부장으로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 공이 컸다.<ref name="공위1"/>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공위1"/>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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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 ===
==== 암살의 원인 ====
[[파일:김구 재판정 출두 장면.jpg|thumb섬네일|left|140px|[[김구]]의 군정청 법정 출두 장면 (1948. 03. 13)]]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15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이던 [[박광옥]](朴光玉)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배희범 등 5명이 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장덕수가 자택에서 피살되자 [[김구]]는 그 배후로 지목되었다. [[12월 4일]] [[미군정]] 경찰은 [[박광옥]]과 [[배희범]]을 체포하였다. 용의자 6명은 장덕수를 암살할 목적으로 1947년 8월 창단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임정]]을 절대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의 간부 또는 맹원들이기도 했다. [[대한학생총연맹]]은 47년 6월 [[운현궁]]에서 발족되었는데 김구를 총재, [[조소앙]]과 [[엄항섭]]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ref name="아아아앙">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ref>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고, [[배희범]]은 초등학교 교사로 모두 [[한국독립당|한독당]] 당원이었다.
 
[[파일:김구 재판 장면.jpg|thumb섬네일|right|210px|미군 군사법정에서 증인 자격으로 심문중인 김구]]
 
범[[우파]][[정당]] 통합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빠졌는데 그 중 [[한국독립당]]과의 통합을 가장 반대하던 사람이 장덕수였다. 이 점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하는 시각에 무게를 더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민당의 [[김성수 (1891년)|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을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하였다. 미소공위 참여에 대해서도 공위참가에 반대하던 "김구"와 찬성하던 "장덕수"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ref name="아아아앙"/><ref name="Referenc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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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격 ==
[[파일:Heo Jeong.png|thumb섬네일|right|160px|친구 [[허정]]]]
 
그는 겸손한 성품이었다 한다. [[허정]]은 그의 성격을 말하기를 "깊은 학식과 인격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웠다. 더구나 그는 달변이어서 설득의 명수였다. 흔히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고 하여 재주가 없다고 말하지만, 설산은 덕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다.<ref name="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43페이지">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43페이지</ref>" 또한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꾸밈없고 솔직한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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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
[[파일:장덕주.jpg|thumb섬네일|right|150px|이복 형 장덕주]]
[[파일:Chang Deok-Jun.jpg|thumb섬네일|right|150px|친형 [[장덕준 (1891년)|장덕준]]]]
[[파일:장덕진.JPG|thumb섬네일|right|150px|동생 [[장덕진 (1898년)|장덕진]]]]
[[파일:장덕희.jpg|thumb섬네일|right|150px|여동생 장덕희]]
[[박은혜 (정치인)|박은혜]]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